복음전도 & 복음

회심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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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9.2012

기독교의 회심 교리를 전혀 아름답지 않게 보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그 교리가 위압적이라고 말한다: “그 누구도 자신의 신념을 내게 강요해선 안 돼요!” 혹은 공격적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누구길래 내가 믿는 것과 내가 사는 방식이 그릇되다고 말하는 건가요?”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달린 것이다. 교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의 추함이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것의 거짓됨이나 진실함이다. 그렇긴 하지만, 기독교 회심의 참된 교리는 아름다운 것이 분명하다. 

어떤 면에서, 회심은 모든 종류의 변태(transformation)들이 아름다운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름답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은 애벌레로부터 나비로의 또는 올챙이로부터 개구리로의 변태를 배운다.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은 그러한 변태들이 “죄 속에서 죽은” 상태로부터 “새 창조”로의 변화를 어떻게 예시해 주는지를 배운다. 꽃이 피고, 계란이 부화하며, 아기 새가 처음으로 날개를 편다. 이 모든 변화들은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니지만, 모두 같은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영적 죽음으로부터 영생으로의 변화를 암시하는 영광의 계시를 피조세계의 도처에 담아 두셨다. 

자연계의 법칙들 중 하나는 변화하지 않는 것은 진보하지 않고 퇴보한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더 나은 어떤 것으로의 아름다운 변화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게 해 두셨다. 이 모든 것이 구원의 경이로움으로 안내하는 푯말이 아니겠는가? 

사실 회심은 이보다 더 큰 것이다. 회심은 그 단순성(로마서 10장 9절을 보라)과 복합성(에베소서 2장 1-10절을 보라)에 있어 아름답다. 

그러나 구원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전체적 편성에 있어 아름답다 

회심은 그 전체적 편성에 있어 아름답다. 회심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음을 믿지 않다가 믿게 되는 순간이다. 

믿기로 결심하는 순간, 믿음의 빈 손으로 그리스도를 붙들기로 처음 결심하는 순간이 예정을 입은 죄인이 구원의 서정에 첫 발을 딛는 순간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 전부터 있었지만, 이제 지정된 효과적 부르심의 때가 임했다. 사람이 계획한 길을 가고 있다가 하나님에 의해 중단되었다(잠 16:9). 

회심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이며 그 계획대로 진행되는 여정의 한 지점이다. 그것은 결정적인 한 순간이지만, 이 순간의 이면에는 엄청난 계획이 있다. 그 계획의 개요를 로마서 8장 30절에서 알려준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의 눈은 사람들이 회개하며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볼 수 있지만, 그 지점으로 이끈 영광 그리고 그 이후에 흘러나올 영광의 영원한 무게는 볼 수 없다. 

로마서 8장 30절에 나오는 구원의 서정의 각 단계에 관한 책들이 많다. 참으로 아름답다. 절망적인 죄인의 상한 심령에 심긴 믿음의 겨자씨는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이 죄인을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의 정점이다. 이미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은혜 안에서, 이 개인의 일평생 누적된 죄악을 간과하고 사랑 안에서 그를 소중한 아들로 삼을 것을 예정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어 속죄 제물로 삼으심으로써, 죄인으로 하여금 성령의 중생케 하심에 따라 그리스도의 의로 의로워질 수 있게 하셨다. 참으로 엄청난 사실이 아닌가? 이 의롭게 하는 믿음의 씨앗이 성부 하나님의 신실함을 통해 성화를 가져오는 믿음으로 성장하며, 다시 성령의 사역을 통해 영화의 약속으로까지 나아간다는 것은 더욱 엄청난 사실이다. 

그 약속에 있어 아름답다 

회심은 그 약속에 있어 아름답다. 그 약속은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다. 모두가 한결같이 매일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변화이다. 누구나 나쁜 것이 좋아지고 그릇된 것이 올바르게 되기를 원한다. 이런 일을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기 나름대로의 의견을 지니고 있지만, 모두가 기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동일하다. 또한 모든 이들은 생명을 원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고(전 3:11), 따라서 사람은 매순간 이런저런 신을 섬기며, 실재하는 것, 참된 것, 사랑스러운 것, 더 낫고 더 올바른 것에 대한 약속을 선천적으로 갈망한다. 브루스 마샬이 유명한 글을 썼다: “사창가에 들어서는 젊은이도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다.”¹⁾ 그것이 성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이것은 모든 우상숭배 행위에 적용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누구도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롬 3:11). 우리는 자신의 신들이 하나님이길 원한다. 사실상, 우리가 찾는 것은 우리가 사악하게 피하고 있는 그분 안에서만 발견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들은 사실상 하나님에 의해 발견되는 자들이다. 우리의 보혜사 성령께서 온 땅을 두루 다니면서 살리실 자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자들을 오래 참으시며, 우리 중 누구도 멸망하지 하고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시고, 무덤에서 “나오라”고 우리를 부르시며, 그래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하신다. 나는 달라질 수 있다! 나는 변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래서 생명을 알 수 있다! 찬송가 가사처럼, “삶에 죄책 없고 죽음도 두렵지 않아 이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복음은 나를 위한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한 참된 소망을 계시한다. 피조세계의, 예술의, 진보와 계몽을 향한 인간 노력의 모든 아름다움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시며, 영화롭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요약되어 있고 그분 안에서 실현된다. 그의 부활이 첫 열매이듯이(고전 15:20-23), 구원얻는 믿음으로 돌이키는 우리의 회심은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0-53)는 불멸의 약속으로 나아가는 회심이다. 

그 무수한 작용들에 있어 아름답다 

회심은 그 무수한 작용들에 있어 아름답다. 구원얻는 믿음으로의 회심을 둘러싼 온갖 결정적인 순간들이 아름답다.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예배당 앞으로 걸어 나가거나, 손을 들거나, 혹은 정형화된 기도문을 반복할 때 “구원을 얻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세대의 많은 목사들은 복음으로 초청하기 위해 그런 특별한 절차에 호소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성경적인 복음을 성경적인 방법으로 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오류 가능성이 많은 인생들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완벽한 능력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은 그 얼마나 큰 기적인가! 

나는 세대주의적 대환난 전 휴거론자가 (더 이상) 아니지만, 나의 회심은 성령께서 1970년대의 “left behind”와 같은 부류의 하찮은 휴거 관련 영화를 통해 내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용서와 안전을 제공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신 후에 이루어졌다. 내가 오늘날에는 그런 방법을 동원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이 그의 자녀를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런 방법까지 마다하지 않으신 데 대해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점잖은 체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복음전도의 약함 안에서 심지어 우리의 결함 있는 설교와 당부 안에서 그의 능력이 온전해진다.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하고 오류 많은 복음 사역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모든 회심들은 마침내 그분을 우리의 그리스도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희생제물로 바라보는 데서 비롯된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경험한 회심이 명백한 사례이다. 대부분의 회심 경험들은 그보다는 덜 극적이다. 아이가 어린이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회심한다. 어떤 사람은 예배 막바지에 앞으로 나감으로써 회심한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거의 3년 동안 매주 주일마다 교회 예배에 참석하던 중에 마침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게는 구원이 필요해. 나는 이것을 믿을 필요가 있어.” 

《그 가공할 힘(That Hideous Strength)》(홍성사 역간)이라는 소설에서, C.S. 루이스는 한 여성의 진지한 회심 과정을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거기서 그녀는 슬픔을 느낄 정도로, 아니 그 이상으로 진지해졌다. 아무런 형상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관목 아래의 곰팡이와 길바닥의 이끼와 자그마한 벽돌 화단은 가시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변했다. 그녀는 어떤 세계 속으로, 어떤 인격 속으로, 혹은 어떤 인격의 임재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차단막도 없는, 요지부동의 끈질긴 그 무엇과 마주쳤다. 

그 높고 깊고 넓은 세계 속에서 그녀의 자그마한 자아 개념은 마치 공기 없는 공간 속의 새처럼 한없이 사그라져 갔다. ‘나’라는 이름은 이제껏 의심하지 않았던 존재였고, 아직 온전히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도록 요구되는 존재였다. 그것은 사람이지만(그녀가 생각해 온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의 물체이기도 했다. 다른 어떤 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분 안에서 다른 모든 존재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자신이 꿈도 꾸지 않은 모습으로 바로 그 순간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일종의 장엄함 또는 슬픔 속에서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이 주조하는 자들의 손 안에 있는지 아니면 반죽 덩이 속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 일어난 가장 큰 일은 시간이라고 부르기조차 너무 짧은 순간에 발생했다. 그 짧은 순간이 기억만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존재 구석구석에서 기쁨 잃은 자들의 목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조심해. 물러나라. 정신 차려. 너무 빠져들면 안 돼”라고 그들은 말했다. 또 다른 곳에서 더욱 교묘한 음성이 들렸다. “너는 종교적인 경험을 한 거야.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지. 누구나 하는 경험이 아니야. 이제 너는 17세기의 시들을 훨씬 더 잘 이해하는 재능을 지녔어!”… 하지만 그녀의 방어막이 설치되었고 이 공격들은 성공하지 못했다.²⁾ 

마귀들이 그녀를 공격하고, 때로는 직접 반박하며, 때로는 그녀의 체험한 것들의 의미를 바꾸려고 한다. 하지만 그 무엇도-심지어 천사들이나 마귀들도-제인(Jane)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영국 정원의 고요함, 기도의 제단, 또는 안락의자에 앉아 성경을 읽는 외로운 영혼의 고독 안에서, 영원이 임한다. 

하나님이 죽은 자들을 생명으로 이끄시는 수많은 방법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어떤 이들은 현저하게 새로운 실재를 즉각 알아차리고, 다른 이들은 한참 시일이 지나서야 자신의 필요에 대해 자각한다. 어떤 이들은 처음 메시지를 듣고서 믿음으로 반응한다. 다른 이들은 일생 동안 메시지를 듣지만 인생의 뒤안길까지 영적으로 들을 귀를 갖지 못하다가 세월을 한참 보낸 후에 어느 날 귀가 열린다. 참으로 기묘하다. 인간의 경험 전반에 걸쳐 그리고 매일의 삶에, 평범한 때에나 특이한 순간에, 하나님이 계시며, 거듭하여 부활의 리허설이 진행된다. 심지어 가장 평범한 회심도 비범하다. 천사들은 2000년 전 바울의 회심 때 그랬던 것과 똑같이, 몇 년 전에 내 딸이 잠자리에서 구원얻는 믿음을 처음 표현했을 때에도 축하를 표했다. 모든 회심은 기적이다. 그리스도를 보는 위대하고 복된 봄(vision)은 우리 자신을 보는 복된 봄(vision)이기도 하다(고후 3:18). 

그 근원에 있어 아름답다 

회심은 그 근원에 있어 아름답다. 창조주께서는 영화로우셔서 그가 하시는 모든 일이 영화롭다. 이 중요한 진리 때문에,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달린 것이다”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름다움은, 인생들이 알아보든 않든, 객관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달린 것이다. 다윗은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원했지만(시 27:4), 설령 그 소원대로 되지 않더라도, 여호와의 아름다우심은 조금도 경감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통상 그의 영광이라 불림–그것을 더 많이 볼수록 더 반사되고 더 확대된다. 하나님이 죽은 자들을 새 생명으로 살리시는 일의 아름다움 중 하나는 그들이 설교와 찬양 그리고 감사로 가득한 심령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사하게 되는 것이다(골 3:16).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증언한 후에, 베드로는 자신을 가리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언급할 수 있었다(벧전 5:1). 따라서 구원얻는 믿음 안에서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그 아름다움을 얻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을 확대하는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4절에서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한다. 

회심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이 아름다우시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영광의 위엄과 위대함에 있어, 그의 모든 속성과 성품에 있어 아름다우시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관한 성경의 묘사도 아름답다. 모세오경 기사들에 표현된 거룩함, 시편 기자들의 감격적인 표현, 욥을 향한 하나님의 장엄하신 응답, 선지자들의 경탄, 복음서들의 증언, 서신서들의 환희와 신령한 송영, 그리고 사도 요한의 기이한 묵시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적이며 압도적인 아름다우심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이 놀랍고, 불가사의하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며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회심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그 근원을 두며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에게는 물론이고 모든 시대에 걸쳐 무한히 미칠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보고 예수님을 알며 또한 영원히 변화될 것이다.

 

1) Bruce Marshall, The World, The Flesh and Father Smith(Boston: Houghton Mifflin, 1945), 108.

2) C. S. Lewis, That Hideous Strength(New York: Macmillan, 1970), 318-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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