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신학

상황화를 위한 네 가지 성경적 기초

아티클
07.18.2016

상황화(contextualization)는 오늘날 선교 분야의 가장 뜨거운 주제들 중 하나이다. 간단히 말해서, 상황화는 주어진 문화적 상황 속에서 복음과 교회를 가능한 한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상황화를 선교사들이 해외에서 행하는 어떤 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며, 서구의 많은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은 비서구 교회들의 상황화 노력이 어디까지 나아가는지에 대해 염려한다. 하지만 사실상,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으로 상황화에 연루되어 있다. 미국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상황화된 교회에서 예배드린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가 상황화를 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북미에서든 남아시아에서든, 모든 신자는 복음과 교회를 자신의 문화에 상황화한다. 왜냐하면 우리 중 누구도 1세기의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와 교회들이 직면하는 물음은, 어떻게 하면 상황화를 잘할 것인가이다. 자신이 상황화를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주의 깊게 그리고 성경적으로 숙고할 수 없으며, 단지 자신이 어설픈 상황화를 행할 것임을 보증할 뿐이다. 혼합주의(syncretism, 일반적으로 종교의 영역에서, 각각 다른 내용이나 전통을 갖는 관념·교리·의례 등을 혼교(混交)하는 태도나 경향-편집주)는 인디애나나 아이오와에서도 인도네시아에서만큼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경험이 아닌 성경이 모든 것들을 평가하는 기준임을 고백해야 한다. 성경은 무오하고 권위 있고 충분하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명령이나 금지나 구속력 있는 모델을 통해, 문제는 해결된다. 성경이 경계를 설정하면,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 경계 내에서는 우리의 문화적 행동 방식에 있어 특별히 신성한 것이 없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곳에나, 기독교에 대한 우리 자신의 문화적 표현만큼 성경에 충실한 다른 문화적 표현들이 있어 왔다. 핵심은 성경을 우리의 심판관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인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의 특별한 맹점을 지적하게 하는 것이다. 

상황화 과정은 사실상 신약 성경 자체에서 시작된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인용되는 성경 본문은 고린도전서 9장일 것이다. 이 아티클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신실한 상황화와 관련한 네 가지 기본적인 사실들을 이 본문에서 도출할 것이다.

1. 바울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포기했다

고린도전서 9장의 핵심은 12절이다.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바울의 고난이 복음의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그 무엇도 복음의 진전에 불필요한 장애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자신의 합법적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그 어떤 불편함이나 개인적인 고난도 기꺼이 견디고자 했다. 예컨대, 그는 고기를 먹을 권리, 믿는 아내와 함께할 권리, 그리고 금전적 지원을 받을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려 했다. 다른 사도들은 그런 권리를 행사했다. 바울은 성경의 진리나 명령에 대해서는 그 어떤 타협도 거부했지만, 복음의 길에 아무런 장애도 놓이지 않게 하려고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다. 

우리 미국인들은 이 문제로 씨름한다. 우리는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하라고 배우며 자랐다. 자유로운 미국인으로서, 나는 우리와 다른 문화적 환경 속에서 상대방에게 무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행동을 할 “권리”를 지녔다. 실내에서 신을 신고 있거나, 왼손으로 음식을 먹거나, 지역사회 리더의 허가 없이 자기 집 마당에 울타리를 치거나, 혹은 식사가 제공되기 전에 생일파티 자리를 떠나는 일 등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옷을 입고 원하는 음식을 먹으며 원하는 대로 우리 집을 장식할 “권리”를 지녔다. 아울러, 이런 일들을 하라는 명령이 성경에 나오진 않는다. 이 권리들을 행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안락함과 편리를 위해서이다. 성경에서 명하는 것들 외에는, 내가 행하는 일이 무슬림이나 힌두교도나 무신론자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면, 무엇이든 기꺼이 포기할 필요가 있다.

2. 바울은 비신자들의 종이었다

둘째, 바울은 비신자들을 향해 종의 자세를 취했다. 19절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섬기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가 “얻고자”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복음전도 대상자들의 종이 되려 했다. 

문화충격에 맞닥뜨릴 때, 종종 우리는 상대방을 섬기기보다는 그의 생각을 바로잡아주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몸소 섬기기 위해 오셨다. 그릇된 자들, 그분에게 반역하는 자들, 마침내 그분을 죽이려 하는 자들을 섬기셨다. 바울은 이 점에서 주님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종의 자세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반영한다. 그것은 고정관념을 흩트리고 장벽을 무너뜨린다. 종의 정신은 효과적인 문화뛰어넘기(cross-culture) 사역의 본질적 특징이며,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지닌 우리의 자유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3. 바울은 복음전도 대상들처럼 살았다

셋째, 바울은 자신이 다가가려 하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했으며, 그리스도의 법을 타협하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그들의 생활양식에 맞춰나갔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0-23). 

다른 문화들보다 더 경건하다고 자부심을 느낄 만한 문화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유대교 문화였다. 바울은 자신의 유대교적 문화유산을 주장할 “권리”를 분명히 지녔다. 동시에, 그는 율법의 짐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행동했고,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처럼 행동했다. 약한 자들(성경과 무관한 양심의 가책을 지닌 자들)에게는 그들의 입장에 맞춰주었다. 어떻게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모습이 되었다. 그는 다가가려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 방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활방식을 모든 면에서 그들에게 맞췄다. 그는 자신의 권리와 자신의 위안과 자신의 문화보다 복음을 더 소중히 여겼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무엇이든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그것을 단순히 이국적인 무례함이 아니라 십자가에 대해 무례를 범하는 것으로 여겼다.

4. 바울은 성경에 매였다

넷째, 바울은 성경의 경계 안에 머물렀다. 동일시와 적응에 대해 말하는 중에, 그는 너무나 중요한 문구를 삽입한다.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21절). 비록 의식적 율법 준수 요구나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함에 따른 징벌로부터는 자유롭지만,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표현된 그분의 권위 아래에 있음을 분명히 자각했다. 성경은-그 신학과 세계관과 명령과 원칙들을 통해-복음전도 대상자들에게 바울 자신을 맞춤에 있어 허용되는 경계를 설정해준다.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 문화는 일반 은총을 반영하지만, 모든 문화는 타락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위배되는 것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다. 바울은 이 원칙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그는 주변의 대중적인 헬라적 세계관의 “지혜”에 맞추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아무리 정교할지라도 그 핵심에 있어 복음을 부정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바울은 교리 문제에서 다양성이나 융통성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순회 교사들의 평판 나쁜 관행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고린도 사회에서 용인되던 부도덕을 분명히 질타했다. 인간 문화와 인간 전통은 타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결론 

상황화는 불가피하며 좋은 것이다. 복음은 모든 문화 속에서 자리잡을 수 있으며, 또한 그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다가가려 하는 자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해야 하며 그들의 문화에 맞춰주어야 한다. 그 문화가 우리를 아무리 불편하게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해야 한다. 하지만, 복음은 어떤 면에서 모든 문화에(우리 문화를 포함하여) 도전을 주며 모든 문화를 정죄한다. 성경이 선을 긋는 곳에서 우리도 선을 그어야 한다. 상황화의 목표는 편함이 아니라 명확함이다. 복음은 타락한 사회나 죄악된 인간에게 결코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복음전도의 길에 아무런 장애 요인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며, 유일한 장애물은 십자가의 진리의 거리끼는 것이 되게 하는 것이고, 그 십자가의 의미가 모두에게 분명해지게 하는 것이다.

편집자 주: 이 아티클은 사우스이스턴 신학대학원의 이곳 Between the Times blog 에서 읽을 수 있는 강의 시리즈의 요약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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