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삶

코로나19 이후 교회로 돌아가야 하는 10가지 이유

으로 데이비드 건더슨(David Gundersen)

데이비드 건더슨은 What If I Don’t Feel Like Going to Church?(교회 가고 싶지 않으면 어떡하지?)의 저자이다. 데이비드 건더슨(PhD,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은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BridgePoint Bible Church의 주임 목사로 봉사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기독교 대학에서 기숙사 지도위원과 부학장, 그리고 교수로서 15년간 학생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일을 했다.
아티클
09.30.2021

왜 대면이어야 하는가?

지난 몇 달 간 대부분의 교회가 대면 모임을 중지했다. 전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과 그로 인한 정부의 규제 조치들, 그리고 타인과 사회를 향한 섬김의 마음으로 우리는 그간 모이는 일을 멈추었다. 그 대신 온라인 “예배”를 드렸고, “가상”의 만남을 가졌으며, 과학 기술을 이용해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제 많은 교회들이 모임을 재개해 나가고 있거나 곧 하려고 한다. 그런데 새로 시작되는 이 예배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우리가 많이 예민해져 있기도 하고, 사람들 간의 차이점이 부각되어 드러날 뿐만 아니라, 거북하고 불편하며 짜증나는 규제와 절차를 감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안전하게 모이려고 노력해도 여전히 교회에 올 수 없는 가정도 있다.

이런 상황을 다 감안해보면 아예 돌아가지 않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신자들도 있을 수 있다. 모임이 회복되어도 그토록 괴리감과 제약이 많다면, 또 온라인에서도 가능한 다양하고 편리한 선택지들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물리적인 모임에 정말 그렇게 큰 위험성이 있다면, 왜 굳이 대면 모임을 해야 하겠는가?

타당한 의문이다. 하지만 마음을 굳히기 전에 먼저 우리가 모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모이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이 사그라들지 않고 더 자라나게 된다.

이제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당신이 교회로 돌아가야 하는 10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1. 우리는 육신을 입은 피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흙으로 아담을,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그리고 그들의 연합을 통해 인류를 지으셨다(창 1:26-27; 2:18-25; 3:20). 우리는 육신을 입은 영혼들이며,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졌고,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 가상의 공간에 떠다니는 무형의 존재가 아니며, 단순히 화면 속에 존재하는 사진이나 닉네임, 혹은 줌(Zoom)이나 페이스타임(Facetime) 속의 프로필 사진도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물질 세계 속에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며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존재다. 최근 몇 달 간 우리는 온라인 세상이 지니고 있는 힘을 목격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갖고 있는 한계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남녀라면 누구도 “장거리 연애”를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하는 교회 가족들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1. 교회는 하나의 몸이다.

교회는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다(엡 1:22-23). 각각의 신자는 그 몸의 서로 다른 부분이지만, 그 모두가 다 함께 긴밀하게 엮여 있다(엡 4:15-16). 우리는 독립적(independent)이 아닌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인 존재이다. 우리가 가진 영적인 은사들은 마치 눈과 귀와 손과 발 같아서 각각의 지체가 제 역할을 감당할 때 그 몸이 성장하고 주어진 사명을 성취할 수 있다. 물론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지만 건강한 몸이라면 그 지체들이 분리된 상태로 남아 있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1. 성령님이 우리를 이끄신다.

신자들은 한 몸을 이룰 뿐만 아니라, 그들 안에는 한 성령님이 계신다(엡 4:4). 삼위일체 중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님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항상 하나 되도록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의 영은 나눠지지 않기 때문에 신자들이 뜻하지 않게 서로 분리되면 마치 고무줄을 지나치게 당겼을 때처럼 우리는 긴장을 느끼게 된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은 마치 그 고무줄이 다시 안으로 당겨지는 것처럼 우리가 함께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1. 우리는 영적인 가족이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입양하신 아버지이시고, 따라서 우리는 모두 영적인 형제자매로서 하나님의 “집”을 이룬다(딤전 3:15). 우리의 연령과 성별이 서로 달라서 바울도 우리를 아버지와 어머니, 자매와 형제, 그리고 아들과 딸로 불렀다(딤전 5:1-2). 그런데 가족은 따로 살지 않는다. 건강한 가족은 함께 살면서 함께 웃고 함께 울며, 또 서로를 돕는다. 장성한 자녀를 둔 부모는 성인이 된 아이들이 함께하는 모습을 가장 좋아하고, 그런 부모들은 다 같이 함께 모일 때 온전한 기쁨을 누린다. 지금 이 시기에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신실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반면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은 생명을 주는 우리의 이 가족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한다.

  1. 말씀의 선포는 성스러운 순간이다.

우리 세대는 존 파이퍼의 설교와 베스 무어의 영상에 익숙해 있다. 지금은 휴대폰이나 컴퓨터 화면, 그리고 다양한 앱들이 정보를 습득하는 가장 기본적인 매체이다. 불과 석 달 만에 우리는 와이파이와 화면을 통해 우리 교회 목사님과 리더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모습을 시청하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이러한 디지털 환경 속에서 우리는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순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행 20:20, 27). 물론 가상 공간의 참여자들과 이후의 시청자들에게도 유익이 되도록 방송을 내보내고, 그것을 녹화해서 올리는 일도 가능하다. 그러나 영적 가족인 지역 교회의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시간으로 선포될 때 그것이 가장 잘 전해진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특정한 설교자, 곧 양떼를 맡기신 그 목자에게 능력을 주시어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게 하시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뜻이 더 잘 전달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바로 이 순간에 목자는 자신의 양을 먹이고, 양은 자기들의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우리는 말씀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순간의 엄숙함을 통해 또한 깨우침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회중 위에 선포되는 것을 들을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울림은 부활하신 주님과 왕이신 그분의 말씀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함께 말씀을 들은 우리들 서로 간에도 전해진다.

  1. 함께 찬송하는 일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 땅 어디에서도 회중 찬송과 같은 경험은 할 수 없다(시 95:1-2). 회중이 함께 찬송하는 일은 하나님을 다시금 그 백성 가운데 좌정하게 하심으로써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회중이 함께 찬송함으로써 우리의 의식 속에는 진리가 각인되고, 우리의 마음은 은혜로 따뜻해진다. 회중이 함께 찬송하는 것은 복음 위에서 한 목소리를 냄으로써 우리의 하나 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회중이 함께 찬송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는 수많은 감정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서도 노래를 부른다(골 3:16). 그런데 화면을 통해서는 서로에게 노래를 부를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연약하다. 미국의 그리스도인은 회중 찬송으로 인해 전염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중국의 그리스도인이 회중 찬송을 부르면 체포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하 교회가 늘 그래왔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신실하고 또 안전하게 다 함께 그분을 찬양하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마스크를 쓰거나 환기를 시키던지, 아니면 실외에서 모일 수도 있다. 혹은 시편을 읊조리거나 아예 속삭이듯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올려드리는 찬양을 하나님은 들으실 것이며, 우리가 함께 모여 표현한다면 그것을 선하게 받으실 것이다.

  1. 우리에게는 세례와 성찬이 필요하다.

당신의 교회에서 이 규례들을 “온라인으로” 행해 왔든 아니면 행하지 않았든, 모든 신자는 이 은혜의 표상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봄으로써 복음의 정수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세례와 성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감각적인 방편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심을 되새길 수 있다. 세례반의 물을 뿌림으로써 새로 신자가 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든, 아니면 잘라진 떡과 포도에서 짜낸 음료를 우리가 먹음으로써 그분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이든(마 28:19; 고전 11:26), 이 두 가지 성례 안에서 우리는 복음을 맛보고 만지며 또 보고 듣는다. 그것을 행하는 방식은 한동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그 성례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더 우리 마음에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1. 당신에게는 할 일이 있다.

만약 당신이 신자라면 교회의 모임 가운데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봉사의 일은 목사와 장로들만 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이다. 모든 신자에게는 사용해야 할 영적 은사들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인 모든 교회에는 각각의 지체들이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롬 12:4-8; 엡 4:15-16; 벧전 4:10-11). 집에서도 듣는 일과 주는 일, 그리고 전화하고 문자 보내는 등의 가상의 일은 여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고 돌아보고 세우는 일에는 우리가 실제로 함께하지 않고서는 올바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많다.

  1. 우리의 예배가 곧 증거이다.

매 주 우리의 친구와 이웃, 그리고 직장의 동료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무너진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에게 있는 소망과 지표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들은 매주 힘들고 비극적인 일들을 겪으며 도대체 은혜와 진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한다. 물론 온라인상으로도 그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람들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다가가신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 세상에는 영적 가족인 지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지극히 은혜롭고 담대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섬기는 모습을 통해 복음에 담겨 있는 변화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1. 문안의 인사는 삶을 변화시킨다.

문안의 인사로 글을 끝맺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행동인데 지금은 너무 제한되고 복잡해져 버렸다. 하지만 신약 전체를 보면 성경의 저자들은 교회에 문안 인사를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끼리도 서로 문안의 인사를 하라고 요청한다. 이러한 문안 인사는 그저 나중에 생각나서 편지 끝에 덧붙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복음이 담고 있는 화해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고, 따라서 역동적인 가족 관계를 더욱 북돋아준다. 교회의 삶과 그것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는 증거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전하는 문안의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는 그 사실 자체에 있다. 기쁨의 문안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하나의 복음을 되새기게 된다. 어색한 문안 인사는 교회 안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됨을 확인시켜 주며, 문안을 피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갈등을 해결하고 마음의 화목을 누려야 함을 되새기게 된다. 어떠한 문안이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몸이 다시 연합하며, 친절을 베풀 수 있게 되고, 이기심을 버리게 되며, 섬김의 문을 열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맞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담겨 있다. 설사 마스크를 쓴 채, 접촉하지 않고, 떨어져서 해야만 할지라도, 문안의 인사는 모든 교회에서 그 삶을 형성해 가는 가장 작은 행동이다. 우리 교회는 10주 동안 모이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주차장에서 실외 예배를 드렸다. 그 때 가장 기쁘고 울컥 하는 순간이 언제였겠는가? 서로 문안의 인사를 나눌 때였다. 우리는 함께 만나야 한다.

결론

지금 당장 돌아가지는 못할 수도 있다. 당신 자신이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연습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당분간은 멀리서 계속 지켜 보아야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절한 때가 되면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모일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며, 당신도 함께하기를 바란다. 어쨌든 우리의 모임은 궁극적으로 천국을 맛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천국의 모습은 격리나 생방송, 혹은 화상 통화 같은 것이 아니다. 그곳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는 곳이며, 성도들과 천사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히 12:22-23; 계 22:4). 다가올 세상에서 우리는 영광스런 대저택에 갇혀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며, 의로움이 있는 새로운 세상에서(벧전 3:13) 다 함께 살고 일하며,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그러니 안전하고 지혜로운 방법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지역사회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대면하여 모여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로워질 때까지.


이 아티클은 개혁된실천사가 번역하여 제공한 것입니다. 유사한 자료를 위해 그들의 웹사이트를 방문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