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신학

초대교회 이후로 설교가 변했나

아티클
06.01.2015

정규적이며 체계적인 성경 강해설교는 교회 사역을 위한 나의 비전에 있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회중에게 성경의 책들을 순서대로 두루 설교하면서, 나는 내가 모세오경과 유대교적 교수 방법과 사도적 교회에 뿌리를 둔 방식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는 강해설교의 이 같은 개화기들의 특성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성경 기록 후의 초대교회 설교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살펴보려는 초대교회의 특출한 설교자들은 암브로스, 제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크리소스토무스,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그리고 피터 크리솔로구스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 강해설교자들의 설교를 읽을 때, 나는 그들의 설교가 오늘날의 강해설교라고 생각되는 설교들과는 사뭇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의 강해설교가 어떻게 이 같이 우리에게 생경하게 느껴지는 초대교회 당시의 설교에 기반하는 것일 수 있을까? 

공유된 확신 

첫째, 교부 설교자들과 우리가 공유하는 확신에 무게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 고대의 강해설교자들과 오늘날의 강해설교자들은 공히 성경 내용 전체가 진리임을 믿는다. 더욱이, 양측 다 성경 말씀이 전해질 때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다고 믿는다.

터툴리안과 같은 교부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나 참되다고 말했다. 어거스틴도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정경인 성경 책들에만 이 같은 존중과 영예를 돌리는 것을 배웠다. 이 책들의 기자들만이 오류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움을 나는 확고히 믿는다.” 성경의 신뢰성에 대한 이처럼 명백한 확언은 교부들의 성경관을 여실히 반영한다.

또한 방대한 교부 문헌들 전반에 걸쳐 실제로 성경이 사용된 사례들에서 우리는 강해설교와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 성경은 주로 설교에서 사용되었다. 수많은 성경 인용 사례들은 고대의 설교자들이 성경을 진리로 믿고서 그리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심을 믿고서 활용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는 어거스틴이 설교에서 “성경을 성경으로, 즉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대합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확신이 없다면, 설교 준비 때 교부들처럼 성경 본문을 깊이 숙고할 이유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의 설교들이 현대 서구의 설교들과 그토록 달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부들의 설교는 종종 모호한 비유들을 사용하며, 숫자들에 의미를 부여했고, 임의로 성경의 의미를 비약하여 해석한다. 해당 본문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듯한 생각도 담고 있다. 현대의 강해설교가 이 같은 고대의 설교들의 후손이라고 하는 개념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일까? 

강해설교는 이교적인 문화와 접점을 갖는다 

강해설교는 일반적으로 이교적인 문화와, 특히 이교적인 수사학과 상호작용하는 기술이며 목회 분야이다. 

강해설교에 몰두한 교부 설교자들은(그리고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이교적인 학문에 대해 매우 다양한 견해를 지니고 있다. 어떤 설교자들은 자신의 강해에 이교도의 글을 인용하여 끌어넣는다. 예를 들어, 암브로스는 현존하는 그의 설교들에서 베르길리우스의 글을 100여 차례나 인용하며, 창세기를 설명하면서 의사인 갈렌의 글을 활용했다. 터툴리안은 이교적인 학식을 신학에 유해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교적인 학교들에서 연마된 수사학적 기술을 활용하는 그의 강연 스타일은 그 누구도 이교적인 환경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함을 상기시킨다.

이교도의 글을 자주 인용한다는 사실은, 이교적인 학식이 교부들의 설교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보다 깊은 차원에서, 고대 세계의 이교 문화는 특히 어휘 면에서(어휘들의 의미와 구성 면에서) 매혹적이었다. 설교에서 성경을 거듭 인용하고 보다 모호한 성경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 명확한 본문을 활용하는 것은 이교도 학교들에서의 호머 해석법에서 배운 방법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에서처럼, 교부 설교자의 교육적 배경이 그들의 사역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설교 학습에 관한 첫 입문서를 어거스틴이 썼다. 거기에는 키케로의 수사학을 가장 잘 활용하는 법을 길게 설명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어거스틴은 화술에 대한 이교도의 통찰을 소중히 여겼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왜 어리석고 우둔한 자들처럼 해야 하는가?” 어거스틴은 키케로의 가르침을 추천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기도와 좋은 설교들 경청하기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교부들의 설교가 오늘날의 설교와 달라 보이는 주된 이유는, 강해설교 사역에서 우리와 우리의 선조들이 (의식하고서든 혹은 의식하지 못하고서든) 해석학과 의사소통에 대한 이교도의 탁월한 통찰력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고대의 설교자들은 성경이 풍성한 진리를 담은 신성한 말씀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숫자의 패턴들에서 의미를 찾았다. 왜냐하면 숫자들 속에 깊이 감춰진 아름다움과 진리와 의미를 보는 것이 당시의 이교 문화였기 때문이다. 만일 수학이나 설득력 있는 화법이나 철학에서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 본문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세속 학문이 고대 설교자들의 화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적인 설교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설교자들은 설교문을 작성하여 그대로 읽었다. 어거스틴과 같은 설교자들은 한 주 동안 성경 본문을 묵상한 후에 즉흥적으로 설교했다. 설교문을 암기하여 읽도록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사학 학교들이 많았다. 이교도 웅변가인 퀸틸리아누스는 청중 앞에서 그렇게 하는 건 손쉽고 미성숙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퀸틸리아누스의 주장에 동의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원고에 대한 설교자의 생각이 달라진다.

성경 이해 및 설교에 대한 우리의 현대적인 접근법이 당연히 고대의 설교자들의 그것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일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강해설교가 교부들의 설교를 물려받고 그 기본적인 확신을 공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도 부정확한 견해일 것이다. 

강해설교는 교회사와 더불어 발전한다 

교부 설교들이 그토록 독특하게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들이 교회사의 특정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설교였기 때문이다. 고대 세계의 어떤 설교자들은 오리겐의 6개 국어 대조성경에서 시작된 대조 역본들의 혜택을 입었다. 어거스틴은 보다 학문적인 제롬역 성경을 채택할 것인지 아니면 그의 회중이 보다 친숙했던 역본을 고수할 것인지를 놓고서 씨름했다. 그는 목회적인 동기에서 회중을 위해 덜 정확한 역본을 고수하기로 했지만, 학문적인 저술을 위해 서서히 제롬역을 활용했다. 

교회사가 진전되듯이, 강해설교의 도구와 형태도 발전했다. 이 사실이 가장 명백하게 적용된 영역들 중 하나는 구속사 영역이다. 초대교회의 설교자들은 성경 이야기가 점점 발전됨을 분명히 자각했다. 이레니우스는 창세기 2장의 나무와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나무와 같이, 구속사 내에서 반복되는 사항들에 근거하여 “재현”(recapitulation) 신학을 발전시켰다. 마르시온 이단의 구약성경 거부와 유대 학자들과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많은 설교자들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유사성과 통일성에 대해 설교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은혜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 모든 사례들은 성경 본문들을 전체 구속사와 결부시키려는 초기 설교자들의 시도였다. 

구속사를 설명하는 새로운 방식들이 교회사를 통해 많이 개발됨에 따라, 교부 설교들이 신학적 해석 면에서 우리에게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사실 초기의 위대한 설교자들은 정경 내의 통일성과 다양성에 대해 정리하고 있었던 셈이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씨름하며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 

결론 

초대교회 이후로 강해설교가 변해 왔는가? 강해설교가 이교 문화와 접점을 가져야 하고 연결되어야 하고 또한 교회사와 더불어 발전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그런데 이로 인해 우리가 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다면, 그리고 성경을 신실하게 전하기 위해 문화와 신학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최상의 자료를 활용하려는 열정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설교를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보화를, 즉 초대교회의 설교를 스스로에게서 박탈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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