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신학

동질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 다민족 교회에 대한 성경의 사례들

아티클
09.25.2015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인도인이며 전직 록 음악인이다. 나는 남부 인도에서 자랐고 여러 인종과 여러 문화가 뒤섞인 지역에서 살았다.

대학교 마지막 학년 때 주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 그때 나는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에 둘러싸인 나 자신을 발견했다. 민족과 문화 면에서 다르고 다른 언어를 말하며 다른 종류의 음식을 먹고 심지어 음악적 취향도 전혀 다른(그들은 딥 퍼플이 누군지도 몰랐다) 사람들이었다. 내가 불편했을까? 그렇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했고 지금도 나를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은 민족적인 차이나 “다름”이 아니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이 사람들이 그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나누었던 연합과 형제애였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께로의 회심을 통해 연합과 형제애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주님은 모든 장벽들을 허무시고 모든 사람을 그의 가족원으로 모으신다. 

북미 또는 전 세계의 선교 사역에서, 교회 성장의 “동질적 구성단위 원칙(homogeneous unit principle)”이 제자들을 증가시키며 “전략적인” 교회들을 개척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생각되어 왔다.¹⁾ 교회 성장 분야의 권위자들은 이르기를, 복음이 기존의 사회적 연결선과 네트워크들을 따라 전파될 때, 그리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굳이 민족적, 문화적, 계층적 장벽을 넘지 않아도 될 때, 교회들이 가장 빨리 성장한다고 한다.²⁾ 사람들은 민족, 언어, 종족, 계급, 사회적 경제적 지위, 교육 수준, 또는 직업에 따라 교회를 이룬다. 심지어는 카우보이들이나 나스카(NASCAR) 애호가들과 같은 동호인들끼리(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라!) 교회를 이룬다. 교회 성장의 “동질적 구성단위 원칙”은, 그런 동질적인 교회들이 민족적, 문화적 경계 등 경계를 넘는 것을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외부인들에게 더 친절하게 다가가기 때문에 더 빨리 성장한다고 주장한다. 이 “전략적인” 동질적 구성단위 원칙이 여러 교회 개척 단체들에 만연하며 선교 및 교회 개척 전략 매뉴얼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지만 성경이 동질적 구성단위 원칙을 지지하는가 아니면 성경은 지역 교회에 대한 다른 비전을 제시하는가?

여기서 나는 이 실용주의적인 틀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도적 교회 비전에 반대됨을 보여줌으로써 교회 성장의 “동질적 구성단위 원칙”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다민족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성경에 더 충실할 뿐만 아니라 다민족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더 온전히 드러내는 것임을 주장할 것이다.³⁾ 달리 말해서, 교회는 민족적, 문화적 측면에서 주변의 지역사회만큼 다양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다민족적 구속 계획과 관련된 (간략한) 성경신학

신약 기독교의 다민족적 비전은 관련된 주제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성경에서 언어적 다양성은 바벨에서 시작된다. 바벨에서 하나님은 인류의 거만한 반역을 제어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혼란스럽게 하신다(창 11:1-9).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다민족적 구속 계획을 보게 된다. 즉,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졌다(창 12:1-3; 22:15-18). 이 약속은 다윗에게 전 세계적인 왕권이 약속되면서 더욱 또렷해진다. 다윗 왕권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과 영광이 온 땅에 두루 세워질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졌다(삼하 7:19; 시 72:17-18). 선지자들은 영광스러운 종말론적 회복을 예고함으로써 이 비전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그 종말론적 회복을 통해, 이스라엘은 유대인들로만이 아니라 참되고 살아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며 경배하는 만민으로 구성될 것이다(사 2:2-4; 56:6-8; 슥 8:20-23). 

신약 성경은 전 세계적인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리는 경계 표지가 더 이상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회개임을 보여준다.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시고 부활하신 메시아 안에서 그리고 그 메시아를 통해 이스라엘이 다시 모이고 재건되며 소생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에 온전히 속하게 한다. 한때 배제되었던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이 확장됨을 누가가 보여줌에 따라, 이 구속사적 움직임이 사도행전에 전개된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선언하며 반영하는 지역 교회 안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든다. 신약 성경은 모든 족속과 방언과 민족 출신의 셀 수 없이 많은 구속 받은 사람들이 일제히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광경에 대한 요한의 놀라운 이상으로 절정에 이른다(계 7:9-10). 

사도적인 교회들의 이질성 

전 세계적인 구속에 대한 성경신학적 비전은 사도적 교회 모델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다채로운 영광은 민족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심지어 언어적 경계를 넘어 설립된 지역 교회들에 반영되어 있다.⁴⁾ 사도적 모델의 이 같은 이질성은 신자들을 하나님께 그리고 서로에게 화목하게 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갈 3:28; 골 3:11).⁵⁾ 다양한 사람들의 “다름”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하는 “하나 됨”이 압도한다. 

초대교회가 성장하면서, 사도들은 초기 회중들의 다양성에서 비롯되는 여러 문제들에 직면했지만, 결코 교회를 이질적 단위들로 분리시키지 않았다. 사도행전의 증거에 따르면, 오순절에 처음 형성된 교회는 광범위한 문화적, 언어적 배경을 가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다(행 2:5-11). 사도행전 6장 1-6절은 서로 다른 문화적, 언어적 배경을 지닌 자들 사이의(즉, 헬라화 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시리아-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히브리인 유대인들 간의) 긴장 관계를 보여준다. 사도들은 그들을 분리하지 않았고, 소수 그룹들에서 봉사의 일을 할 사람들을 뽑음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사도행전은 바리새인 출신(바울), 이방인 출신(누가), 레위인 출신(바나바), 헤롯 왕가의 일원(마나엔), 흑인(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등을 포함한 안디옥 교회의 다양한 리더십을 언급함으로써 초대교회의 이질적 특성을 재차 알려준다(참조, 행 13:1). 

로마서는 바울이 유대인과 헬라인을 포함한 다양한 인종들로 구성된 회중에게 쓴 편지이다(롬 7:1; 11:13). 바울은 복음 때문에 사랑으로 함께 살 것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취향을 희생할 것을 그들에게 당부한다(롬 13:8-10; 14:1-23). 여기서 우리는 복음이 개인의 구원은 물론이고 공동체의 성결을 위한 것이기도 함을 본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본보기를 따라 자신보다 남을 우선적으로 배려함으로써 이질적인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회중에게 쓴 편지인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강조하며, 서로의 유익을 구하고, 영적으로 약한 형제들의 양심을 신중히 배려할 것을 당부한다(고전 10:23-33; 12:12-13). 이들 두 경우에서, 이질성에 따라 교회들을 분리한다는 생각은 바울의 머릿속에 전혀 없었다. 보다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거나 사람들에게 더 안락한 느낌을 주기 위한 “전략적” 고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나누는 삶보다 결코 더 우선시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신자들이 서로 사랑하면 자신들(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인류라는 확신이 일어나며 이러한 확신은 교회 안의 연합을 가져온다. 사실, 바울은 교회 안의 다양한 사람들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와 영광이 나타난다고 선포한다(엡 3:1-10). 

또한 초대교회는 사회적, 경제적 계층 차별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렸다. 바울은 종과 주인이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로서 함께 친교를 나눌 것을 권함으로써 신분제도를 근본적으로 뒤엎었다(고전 7:17-24; 몬 8-16절).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은 친교를 가로막는 경계선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신분 차이를 말소한다.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부자들을 편애하거나 특별하게 대우하지 말 것을 밝힌다. 그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사회경제적으로 서로 이질적인 두 그룹으로 분리될 것이 아니라 함께 친교를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약 2:1-9). 아울러, 신약 성경은 교회가 연소자들과 연로한 자들이 함께 친교를 나누고 연합하고 자기희생적인 섬김의 삶을 사는 “다세대” 공동체임을 알려준다(딤전 4:12; 5:1-6; 딛 2:1-8; 요일 2:12-14). 

이질적인 다민족 회중의 사도적인 모델은 신약 성경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초기 기독교 역사의 증거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는 “분열된 로마 세계에 영향을 미쳐서 기독교 운동을 성장시켰던 것은 바로 다민족 교회의 이질적인 특성이었다”라고 말했다.⁶⁾ 교회들의 동질성이 사회의 현 상태를 강화하는 면도 있지만, 성경의 증거는 복음이 역사상 결코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민족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장벽을 허물었음을 보여준다.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한 신약 성경의 논박 

동질성이 신약 성경에 위배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자민족중심주의적(ethnocentric) 사고방식을 조장하며 강화하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 전반에 걸쳐 우리는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한 논박을 보고, 지역 교회들에서 민족적 배경이 다른 신자들이 서로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당부를 본다.⁷⁾ 바울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심을 확고부동하게 주장한다(골 3:11). 그리스도께서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십자가를 통해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엡 2:14-16). 신자들은 새 창조의 일부이며, 그들 모두가 한때 아담 안에서 죄인이었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류이다. 

이 주제는 이방인들과 자신을 분리시켰던 베드로를 바울이 질책하는 갈라디아서 2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갈 2:11-16). 갈라디아에 있는 다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이방인들과 더불어 식탁 교제를 하는 것을 주저했다. 유대인들을 혼란에 빠뜨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식으로 움츠러드는 것이 복음 자체에 대한 모욕임을 주장했다(갈 2:15-21). 여기서, 식탁 교제를 통해 이방인(다른 민족 출신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려는 실용주의적 배려에 우선한다.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자민족중심주의의 뿌리를 공박한다. 그는 인간의 보편적 부패성을 역설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칭의 은혜로 인한 복음의 구원 능력을 단언한다(롬 1-3장).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3:21-26). 모두가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롬 4장).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정죄된 상태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롬 5:12-21). 바울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나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함을 역설한다(롬 2:17-29; 11:17-24).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질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회중을 향해 민족적 자부심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자로서 함께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 

바울만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해 논박한 것이 아니다. 복음서 전반에 걸쳐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한 논박이 발견된다. 예수님은 이방인들, 세리들,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어울림으로써 바리새인들의 민족주의적 교만을 질타하셨다. 복음서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얻게 하는 것은 민족적 정체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임을 가르친다. 회개로의 부르심은 민족적, 국가적 교만에 대한 회개로의 부르심을 포함한다. 존 파이퍼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민족의식을 이긴다.”고 말했다.⁸⁾ 그는 이 주제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복음서에서 제시한다: 백부장의 믿음(마 8:5-13),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눅 10:33), 치유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에서 이방인만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것(눅 17:16), 치유받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막 7:26), 성전 정화(마 11:17). 예수님은 분명히 바리새인들의 자민족중심주의적 교만을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동질적 구성단위 원칙”을 주장하는 자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들 간에 자민족중심주의적 교만을 조장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장벽을 넘는 것을 불편해 하는 불신자들에게 동질적인 교회들이 다가가기가 더 쉽다는 점을 주장한다. 달리 말해서, 동질성 주창자들은 단일 민족과 단일 문화의 교회를 세움으로써 복음에 대한 문화적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 더 전략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자민족중심주의적 편견으로 향하는 내재적 성향을 지닌 죄악된 인간이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도록 요청받지 않고서도 그런 성향에서 점차 벗어나게 될 거라고 보는 것은 고지식하며 지나치게 희망적인 생각이다.⁹⁾ 신약 성경의 증거에 따르면, 예수님과 사도들은 불신자들의 자민족중심주의를 결코 두둔하지 않았고, 도리어 복음 메시지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며 “다른 사람들”을 포용할 것을 당부했다. “동질적 구성단위 원칙”이 자민족중심주의적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서 사람들을 얻는 것을 강조하는 반면에, 예수님의 접근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리스도는 민족주의적 교만의 뿌리에 도끼를 대신다.¹⁰⁾ 

신약 성경의 교회들은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었는가? 

교회 성장 운동의 창안자로서 “동질적 구성단위 원칙”을 공식화했던 도널드 맥가브런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회중들이 현저히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었다”라고 주장했다.¹¹⁾ 맥가브런은 성령의 영향 하에 사도들이 교회 성장을 위해 동질적 구성단위들을 고려하면서 처음에는 주로 유대인들에게 다가갔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유대교 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됨에 따라, 교회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놀라운 성장을 할 수 있었다…회당 내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은 민족적, 계층적 장벽 없이 그렇게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¹²⁾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신약 성경을 이렇게 읽는 것이 신실한지 검토해야 한다. 나는 맥가브런의 독법이 왜곡되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점차 전개되는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방식을 간과했기 때문이다.¹³⁾ 사도들은 어떤 종류의 동질적 구성단위 원칙도 따르지 않았다. 이는 오순절에 모인 유대인들의 문화적, 언어적 다양성에서 그리고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온 후의 회중의 이질적 특성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누가는 구원사적 경로를 따라 교회의 사명이 어떻게 진전되었는지를 사도행전에서 보여준다. 누가의 요점은 사도들에 의해 선포되고 성령의 능력으로 뒷받침된 복음이 넘기 힘든 장벽들을 넘어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을 세워 나갔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널드 맥가브런과 교회 성장 운동은 동질성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선입견이 개입된 실용주의적인 틀을 사용해서 성경을 읽은 것이다. 

결론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도적 교회 모델은 교회가 민족, 문화, 계층, 연령, 또는 어떤 친밀한 그룹을 따라 세워지거나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언어적 차이로 인한 교회 분리가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용어가 있다면 언어적 차이가 반드시 분리 원인으로 작용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신자들이 종족과 문화를 넘어 함께 나누는 사랑과 연합을 외부인들이 볼 때, 가장 생생하게 나타난다. 교회의 급속한 성장과 확장을 바라는 실용주의적 욕구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연합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레네 파딜라가 잘 설명한다. 

“사람들은 민족, 언어, 혹은 계층 장벽을 넘어서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서 새 인류로 통합됨의 문제이다. 자신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은 민족, 문화, 사회 계층, 성별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 결과 서로 화목을 도모한다.¹⁴⁾ 

내가 급속한 성장과 확장을 반대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도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어디에서도 교회를 친밀한 그룹 별로 나누라고 하는 명령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복음 사역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성경의 증거는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종족, 언어, 민족 면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 모여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서 함께 예배하며 친교를 나눈다. 그리스도 안에는 “흑인”도 “백인 우월주의자”도 없으므로 미국의 교회들은 인종적 화해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브라만”이나 “달리트”나 “투치족”이나 “후투족”의 구별이 없음을 인식할 수 있다.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우리의 회중이 우리의 연합을 반영하며 또한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를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엡 3:10). 그분에게 합당한 영광과 영예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 

1) 이 아티클은 저자의 아티클인 “Caste and Church Growth : An Assessment of Donald McGavran’s Church Growth Principles from An Indian Perspective”(카스트 제도와 교회 성장 : 인도의 관점에서 본 도널드 맥가브런의 교회 성장 원칙에 대한 평가, The Southern Baptist Journal of Missions and Evangelism)로부터 발췌하여 편집, 수정한 내용을 포함한다.

2) Donald A. McGavran, Understanding Church Growth(Grand Rapids, MI: Eerdmans, 1970), 190-211.

3) 물론, 나는 미국의 대다수 시골 지역들이나 일부 교외 지역들처럼 단일 민족 배경을 지닌 지역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민족으로서 한 문화를 공유하므로,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교회가 불가피하다. 나는 둘 이상의 문화(민족)를 배경으로 하는 지역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단일 민족의 배경에서도, 교회들이 계층, 연령, 또는 친밀한 그룹별 동질성에 따라 설립되어서는 안 된다.

4) 맥가브런의 동질적 구성단위 원칙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철저한 반박을 보려면, 남미 신학자인 C. Bene Padilla의 “The Unity of the Church and Homogeneous Unit Principle,”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6(1981): 23-30을 참조하라. 여기 수록된 토론 내용의 많은 부분이 파딜라의 설득력 있고 예리한 성경 근거 조사에 근거한 것이다.

5) David Smith, “The Church Growth Principles of Donald McGavran,” Transformation 2(1985): 27.

6) 위의 책, 28. 참조, Michael Green, Evangelism in the Early Church, 재판(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2004).

7) (다른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소위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유용하게 기여한 사항들 중 하나는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한 신약 성경의 반박을 새롭게 강조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N. T. Wright,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 vol.2(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3), 774-1038을 보라.

8) Bloodlines, 115-27에 실린 존 파이퍼의 탁월한 논문을 보라.

9) 위의 책, 118.

10) 이것은 인도에서 목회 사역을 하는 친구들의 고통스런 경험일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의 몇몇 단일 민족 교회들에서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고린도후서 6장 14-18절을 직접적으로 위반하여, 사람들은 다른 민족인 신자보다는 불신자라도 같은 민족, 같은 계급인 사람과의 결혼을 선호한다. 간혹 두 신자가 서로 사랑하여 계급이나 민족적 경계를 넘어 결혼하길 원할 때에도,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는 가족들이 그런 결혼을 거부함에 따라 자민족중심주의적 편견이 추한 머리를 든다. 분명 그리스도를 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안에도 “동질적 구성단위 원칙”이 죄악된 자민족중심주의적 편견을 조장하고 있다.

11) 동질성 원칙의 주창자들 중 어떤 이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현대의 민족적, 민족언어학적, 문화적 구분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네 가지 근거들을 제시한다. (1) “유대인”과 “이방인”은 주로 민족적인 용어들이 아니다. (2)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은 현대의 민족 구분과는 달리 율법에 뿌리를 둔 것이다. (3) 신약 시대의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문화적 거리는 오늘날 민족들 간의 문화적 거리만큼 크지 않았다. (4) 유대인들은 이방인 구원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오늘날의 기독교 상황은 그렇지 않다. Richard W. Hardison, “A Theological Critique of the Multi-Ethnic Church Movement: 2000-2003,” (남부 침례교신학교, 철학박사 논문, 2014), 117. 먼저, “유대인”과 “이방인”은 주로 민족적인 구분이 아니라 주로 율법에 뿌리를 둔 종교적인 구분을 나타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의 적대감은 단순히 종교적인 것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문화, 언어, 민족의 측면으로까지 확장되었다. 2세기의 성전 중심 유대교의 모든 문헌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에 문화적 간격이 크지 않았다고 하는 개념은 전혀 올바르지 않다. 또한 오늘날의 상황과는 달리 유대인들이 이방인 구원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이 자민족중심주의를 지니고 있다. 타락한 인생들인 우리는 공동체 내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그들과 함께 살려고 노력할 뿐이다. 따라서, 비록 유대인-이방인 구분과 현대의 민족-문화적 구분은 일치하지 않는 측면도 있지만, 그 평행적 측면을 보장할 만한 연속성의 요소들도 충분히 있다. 더욱이, 신약 성경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넘어 “야만인”과 “스구디아인”과 같은 민족언어학적 범주들까지 포함하여 연합할 것을 당부한다(골 3:11).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은 다른 모든 정체성 문제에 우선하며,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라는 당부는 “다름”의 모든 범주를 포함한다. 그리고 이 연합은 지역 교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삶의 형태로 나타난다.

12) Donald A. McGravran, “The Priority of Ethnicity,” Evangelicla Missions Quarterly 19(1993): 15.

13) Donald A. McGravran, Understanding Church Growth(Grand Rapids, MI: Eerdmans, 1970), 202.

14) 파딜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누가의 기록은 사도들이 수적인 교회 성장을 위해 ‘단일 민족 회중들’의 형성을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교적 편견을 용인했다고 하는 이론을 입증해주지 않는다. 누가의 기록이 그 이론을 입증해준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선입견적 개념으로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다. (1) 인종적 편견이 ‘기독교화를 도울 수 있고 또한 기독교화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현대의 이론을 사도들이 공유했다. (2) 교회의 확장은 동질적 구성단위 원칙 수용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이 근거 없는 개념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예루살렘 교회로서는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을 확장시키는 일이 너무나 힘들어서 환상과 주님의 명령이 있고서야(행 8:26 이하; 10:1-16) 혹은 핍박을 겪고서야(8:1 이하; 11:19-20) 비로소 실행되었다고 하는 사도행전의 요점을 놓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전략적인 이유에서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고 말하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Padilla, “Unity of the Church,” 25.

15) Padilla, “Unity of the Church,”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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