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신학

의미 있는 설교를 위해 교인들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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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2015

설교자가 천천히 왔다갔다하면서 회중을 주시했다. 매주 있는 결신 초청의 시간이었다. 그는 회중더러 손을 들어 응답할 것을 권했다.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설교자는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비디오 스크린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목사의 지시에 따라 그 멀티사이트 교회의 여러 예배당 중 가장 가까운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있었다. 최근에 나는 그 목사를 위한 프리랜서 리서치 일을 시작했었다. 그의 여러 예배 장소들 중의 하나를 방문하면서 겪은 경험은 그의 사역에 대한 “느낌”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목회는 설교자가 회중에 대한 “느낌”을 갖는 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나는 떨쳐버릴 수 없었다.

비디오 예배나 멀티사이트 교회 성장 모델에 대해 독자의 생각이 어떤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의 이 같은 경험들은 설교자와 교인 간의 단절이라는 문제에 대한 우려를 더 분명하게 해주었을 뿐이다. 이러한 단절은 크고 작은 모든 교회들에서 점증하는 딜레마이다.

사실, 이 딜레마는 비디오 예배를 드리는 멀티사이트 교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많은 교회들에서 목회자들이 회중과 친밀해지는 문제로 씨름한다. 그리고 커져 가는 교회에 복잡한 일들이 더 많이 부가됨에 따라, 격리의 유혹이 점점 더 커진다. 

물론 작은 교회의 설교자라도 모든 교인들과 절친한 벗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큰 교회의 설교자가 모든 교인들을 잘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사역의 비중을 설교에 점점 더 많이 두고 목양에 점점 더 적게 두는 설교자, 교인들과 교류하는 일에 점점 더 소홀해지는 설교자는 자신이 더 많은 시간을 바쳐 제대로 해내고자 하는 바로 그 임무를 사실상 손상시키고 있다.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지근 거리에서의 목양이 필요하다. 

설교 사역은 영혼을 돌보는 사역과 분리될 수 없다. 사실 설교는 영혼 돌보는 사역의 확장이다. 의미 있는 설교를 하길 원하는 목사들이 교인들을 가급적 잘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들은 많지만,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것들 세 가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1. 의미 있는 설교는 사람들의 우상을 염두에 둔다

내가 교회 예배나 컨퍼런스들에서 설교하러 다니면서, 나를 초청한 목사에게 종종 묻는 첫 질문들 중 하나는 “이 교회 교인들의 우상은 무엇인가요?”이다. 나는 단지 잠시 들러서 “내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희망이나 꿈들에 대해 가능한 한 잘 지적함으로써 그 목사와 회중에게 도움을 주기를 원한다. 서글프게도, 어떤 목사들은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바울이 아덴에 방문했을 때, 그 도시가 우상들로 가득함을 보았다(행 17:16). 그는 이를 단순한 철학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영적인 문제로 간주했다. 그것을 지적할 때, 그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17:23). 그리고 그는 특정한 교회들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특정한 죄와 잘못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그저 일반적인 내용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 교회들에서 일어나고 있던 구체적인 일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설교단에서 교인들을 당황하게 하거나 그들의 허물을 노출시킴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목사가 친숙한 어조로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교인들과 충분히 교류해야 함을 뜻한다.

목사가 교인들과 함께 친밀한 시간을 보내기 전까지는, 그의 설교를 통해 퇴치하고자 하는 우상들은 단지 이론적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은 몇 가지 우상들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지역사회, 자체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회중, 그리고 회중 내의 특정한 무리 등이 보다 특정한 우상이나 죄의 패턴을 보유하는 경향이 있다.

재정이나 직업이나 가정과 관련한 교인들의 그릇된 소망을 먼저 알고 있으면, 설교에 도움이 될 것이다. 올바른 본문을 선정하거나 그 본문을 설명하면서 어디에 강조점을 둘 것인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럴 때 설교는 단순한 연습 문제가 아니라 사역이 된다. 

  1. 의미 있는 설교는 교인들의 시련을 마음에 둔다

내가 죽어 가는 사람들의 손을 잡거나 우는 사람들의 비통한 심정을 듣기 시작한 후에, 내 설교가 바뀌었다. 설교자가 죄와 두려움과 염려와 상처를 얘기하는 교인들의 말을 충분히 듣기 전까지는, 그의 설교는 탁월하며 열정적일 수 있으나 감동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서 설교단에 선다. 그것은 귀한 일이다.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은 존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설교자는 그 설교단에서 교인들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도 느껴야 한다. 그들이 처한 시련의 골짜기를 공감해야 한다. 그의 성경은 교인들의 눈물로 얼룩져야 한다. 

정규적인 만남을 통해 교인들의 시련을 알고 있는 설교자는 태만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예화가 달라지고, 그가 말하는 이야기 유형이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말씀 적용이 달라질 것이다. 나는 교인들이 실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해 농담을 하는 설교자들을 본 적이 있다. 나도 그런 설교자였다. 우리는 짐을 들어주기 위해 설교단에 서지만, 부주의한 말로 인해 도리어 짐을 더 지우게 된다. 

설교자인 당신은 진심으로 교인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지녔는가? 이것은 당신이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인지를 묻는 말이 아니다. 교인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는가를 묻는 말이다. 그 일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 당신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설교는 그 무감각한 마음을 드러낼 것이다. 

백성의 죄를 비통해했던 모세를 생각해보라(출 32:32). 바울의 많은 눈물을 생각해보라(행 20:31; 고후 2:4; 빌 3:18; 딤후 1:4).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불쌍히 여기셨던 그리스도의 마음을 생각해보라(마 9:36). 당신은 교인들을 실제로 알지 못해도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역할 모델로부터 감동적인 말을 듣는 것과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감동적인 말을 듣는 것은 같지 않다. 설교자는 교인들의 짐을 마음으로 지지 않고서 본문을 대해서는 안 된다. 

  1. 의미 있는 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교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대면서 기도한다

모든 신실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놓고서 기도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기를 기도한다(사 55:11). 교인들의 마음 문이 열리기를 기도한다. 교인들의 영혼이 구원받고 그들의 삶이 변하도록 기도한다. 이것은 좋은 기도이다. 더 좋은 것은 존 스미스와 줄리 톰슨과 컨팅햄 가족을 위한 기도로 준비되고 작성된 설교이다. 더 좋은 것은 톰 존슨의 구원과 빌 루이스의 회개와 매리 앨리스의 치유를 위한 간구와 같은 기도로 준비하는 설교이다. 

바울은 자신의 보살핌을 받는 이들에게, 기도할 때마다 그들을 기억함을 거듭 상기시킨다(엡 1:6; 딤후 1:3; 몬 4). 그가 종종 구체적인 이름을 거론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단지 여러 일반적인 언급을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바울은 한 회중을 가까이서 목양하지 않고 주로 교회 개척 선교사로서 섬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의 형편을 멀리서라도 알려고 노력했으며 가급적 자주 그들을 방문하고자 했다. 지역 교회 목사는 교인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훨씬 더 많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는 교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대면서 기도해야 한다. 

당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아무개 자매가 당신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음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아무개 형제가 당신의 설교를 매우 좋아함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서 인상을 쓰는 남자가 실제로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경청하고 있음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앞쪽에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가 들은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음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이 사실들을 알 때, 당신은 교인들을 위해 더 깊이, 더 개인적으로, 더 목회적인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설교가 더 좋아질 것이다. 더 실제적인 설교가 될 것이다. 설교가 단지 당신의 머리와 입에서만 나오지 않고 마음과 영혼과 뱃속에서 나올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사항들은 당신이 이런 설교에 관심이 있다는 가정하에서 의미가 있다. 만일 당신이 설교를 사람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적 증언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영적 자료”를 제공하는 것으로 또는 종교적 성향을 지닌 자들을 위한 격려 연설 정도로 여긴다면, 여기 언급된 사항들을 모조리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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