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신학

성령, 기도, 그리고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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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2016

나에게는 점점 더 커지는 확신이 있다: 오늘날의 교회에게 매우 필요한 것은 성령의 신선하며 오래 지속되는(fresh and long-lasting) 사역이라는 확신이다. 적어도 내게 있어, 이 확신은 그저 성령께서 임하셔서 우리를 부흥시키시거나 권능을 부여해주시는 것이 교회에 필요하다는 그런 확신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다른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계시하기 위해 우리는 성령이 필요하다는 확신이다. 

만일 나처럼 이 확신이 당신의 마음과 심령 속에 새로운 힘과 에너지를 갖고 다가온다면, 이렇게 묻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확신이 우리 안에 제대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즉, “우리가 그런 확신을 제대로 붙들었는지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기도에 전념하기 

최근에 나는 이런 종류의 물음들을 곰곰이 생각해 왔고, 이에 대한 긍정적 답을 가능하게 하는 적어도 두 가지의 표지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기도에 헌신하는 사람이 그런 확신을 품는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 확신을 “갖는다”. 사실, 나는 정규적인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만이 진정으로 이 확신을 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기도를 통해, 성령의 사역 안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중생 사역을 완수하실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을 나타낸다. 만일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함을 나타낸다.

만일 내 말이 옳다면, 즉 기도가 우리의 확신을 나타내는 분명한 증거라면,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누가복음의 결정적인 지점들에서 우리는 이 역동적인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적어도 네 차례에 걸쳐 사람들은 기도와의 밀접한 관련성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인식한다: 

  •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베드로가 인식하기 직전에,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셨다(9:18-20).
  •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을 때, 하늘로부터 들린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이 지식에 근거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계시하셨다.(9:28-36).
  • 예수님이 세례(또는 침례)를 받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강림하시며 하늘로부터 들리는 음성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시켰다(3:21-22).
  • 연로한 시므온과 안나는 성령을 통해 그리고 정규적인 기도를 드리는 중에, 아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인식하게 되었다. 

이들 네 사례는 중요하다. 이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데에는 목적이 있다. 이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을 따르기 시작할 때 그들은 성령의 신선하고 오래 지속되는 사역을 통해 그렇게 함을, 그리고 그것은 기도를 통해 이루어짐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진심으로 확신할 때, 우리는 기도하게 된다. 

성경 강해에 전념하기 

둘째, 성령의 신선하고 오래 지속되는 사역이 필요함을 확신할 때, 기도만 동반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 강해에도 전념하게 된다.

교회가 영적 필요를 자각할 때, 교인들과 설교자들은 간단하면서도 생생하게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에 갈급함을 느낄 것이다. 달리 말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성경 본문에 몰두하기 마련이다. 

성령과 설교 

성령과 설교의 관계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성령에 전념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배운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것은 마치 “문제 청소년들에게 먹혀 드는[통하는] 행동 방식” 또는 “영정 성숙” 중 하나만 추구할 수 있지 둘 다 추구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들은 우리더러 누구든 “성령에 이끌리는 교회”와 “말씀 중심의 교회” 중 어느 한 곳에 다니게 되며 둘 다인 교회에 출석할 순 없다고 믿게 하려 한다. 이런 고정관념이 우리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릇된 개념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성령과 말씀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말하는 식의 논의에 넌더리가 난다.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런 논의를 잠재우는 법을 배울 때이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에 신선하고 지속되는 성령의 사역이 필요함을 인식하는 이들은 기도는 물론이고 성경 강해에도 몰두할 것이라는 점이다. 성령의 사역은 언제나 말씀의 사역과 극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를 찾아보기 

여러 성경 본문을 고를 수 있겠지만 한 본문만으로도 충분하다. 히브리서 3장, 특히 7절을 보라. 이 구절은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로 시작된다.

이 짧은 문구 안에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첫째,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95편을 인용하면서 성령께서 저자가 되신다고 언급한다. 그는 “성경이 이르듯이”나 “시편 기자가 이르듯이”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라고 한다.

이 표현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면 성경 본문을 묵상하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음성이 성경 본문과 역동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기록된 성경 말씀 속에 성령께서 저자로서 이미 계신다. “만일 오늘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면,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큰 소리로 성경을 읽으라”라는 트윗 글을 쓴 사람이 존 파이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글에 나는 동의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음성이다. 따라서, 교회가 신선하고 오래 지속되는 성령의 사역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확신은 성경 강해에도 전념해야 함을 뜻한다.

히브리서 3장 7절에서 두 번째로 놀라운 사실은 문법적인 내용이다. 여기 사용된 동사는 현재형이다. 보다 정확히 읽으면, “성령께서 말씀하시듯이”이다. 이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시편 95편은 원래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에게 주어진 것인데, 히브리서에서는 히브리서 기자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현재의 말씀으로 언급된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히브리서 3장 7절은 오늘날 성령의 사역과 자세히 설명되는 하나님의 말씀 간의 역동적인 관계를 분명히 알려준다. 

결론 

갱신된 성령의 사역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기도와 설교에 헌신하는 것이 존재하면 이 확신이 우리의 뼈와 골수에 이미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최근에, 이 확신이 신선한 활력을 가지고 나의 영혼 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이것이 거짓이 아니고 참되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기도와 설교가 내 삶 속에서 점점 더 실천적인 효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도 동일한 효력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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