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신학

비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 멤버에게 설교하라

Article
02.25.2010

설교자들은 누구를 대상으로 설교하는가? 최근에 나는 설교에 관한 서적들을 서가에서 여러 권 꺼내어 읽었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책이 거의 없었다.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 스타일을 개조하는 데에 훨씬 더 큰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일부 목사들은 청중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과 포스트모던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고든 콘웰 신학교 학장이자 노스캐롤라이나의 샬럿에 위치한 멕클렌버그 회중교회의 목사인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는 자신이 불신자들을 타깃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그는 1999년의 한 인터뷰에서 그 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맥클렌버그는 구도자를 타깃으로 삼는 교회이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초점을 맞추기 위해…시작되었다. ‘구도자를 타깃으로’ 삼는다는 말은 교회의 진입점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맞추어 설계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탐색 모드에 있을 때, 우리는 어떤 방식 또는 형태로 그들과의 접촉점을 마련할 수 있다. 또는 그들이 적극적인 구도자가 되도록 그들을 도우려고 시도한다. 왜냐하면 교회에 다니지 않는 모든 사람이 구도자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¹⁾

설교가 이 “진입점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화이트는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능력에 있어 다른 설교자들과 구별되는 빌 하이벨스, 밥 러셀, 릭 워렌 같은 사람들을 모델로 삼았다.²⁾ 

또 다른 그룹의 저자들은 포스트모던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을 향한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브라이언 맥라렌은 이르기를, 쇼맨십과 상세한 분석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반감과 함께, 진정성과 내러티브(narative)를 선호하는 포스트모던적 성향을 반영하여, 2001년에 그의 설교가 바뀌기 시작했다고 했다. 현재 그의 설교에 핵심적인 것은 내러티브와 진정성이다.³⁾ 

이들 두 사례들이 우리를 신경 쓰이게 한다. 설교자가 청중에게 너무 맞추려 하면, 타협적인 메시지를 전하게 된다. 구도자 민감형 교회(seeker-sensitive church)와 이머징 교회들이 그런 경우이다. 그럼에도 설교자는 실제의 사람들에게 설교한다. 그 사람들 중에는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 포스트모던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을 비롯하여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회중석에 앉은 이 모든 유형의 사람들을 고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아티클에서는 바로 이것을 겸허히 시도하고자 한다. 

나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서 설교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설교하라 

주일 대예배 설교에서 비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규모가 작고 비그리스도인들이 없는 교회일지라도 그렇다. 우리 교회는 크지 않다. 그러나 나는 회중석에 앉은 사람들 중의 일부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여러 해 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여전히 중생을 필요로 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 교인들의 초청을 받고 교회에 나오지만 자신이 비그리스도인임을 밝힌다. 그런가 하면, 교회 전도지나 주보나 웹사이트 또는 예배당 건물을 보고서, 지나가다가 들르는 이들도 있다. 달리 말해서, 비그리스도인들도 교회에 올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복음을 명확히 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펼칠 때 복음을 명확히 하는 것은 설교자의 책무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우리는 결국 복음의 사역자들이다. 모든 설교에서 복음을 똑같은 내용으로 전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든, 목사는 “이 내용이 어떻게 복음을 잘 드러내는가?”라고 자문해야 한다. 복음 중심의 설교와 복음을 끝에서 살짝 덧붙이는 설교의 차이는 불신자들도 분간할 수 있다.

우리 교회는 신학교 근처에 있으며, 목사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나온다. 종종 그들은 “모든 설교에 복음이 들어 있어야 하나요?”라고 묻는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렇습니다”이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 복음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에 이르는 모든 성경 본문과 뜻이 통하기 때문이다. 둘째, 회심하지 않은 자들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믿음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이것을 거듭하여 들을 필요가 있다). 설령 불신자가 복음을 수십 차례 들었을지라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오늘 설교자인 내 앞에 이끌어 놓으셨다. 따라서 나는 세상과 죄와 구원에 대한 그의 생각에 복음으로 다시 도전을 가하고자 한다.

복음을 명확히 하는 것은 목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들 중 하나이다. 

강해적으로 설교하라 

비그리스도인들을 고려하는 목사라면 강해적으로 설교하는 것이 가장 좋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믿는 것을 믿는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우리의 교리와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비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잘 섬기는 방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듯이 그들을 솔직하게, 신실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성경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많은 저자들과 교회 리더들이 소속된 어떤 운동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그들이 교회에 소속되었든 안 되었든 “내러티브 설교”에 가장 잘 반응한다고 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원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이야기를 좋아한다. 강해식 설교는 교회에 속하지 않은 이들에게 성경의 줄거리를 제공해야 하며, 이 줄거리는 사람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줄거리를 제공하며, 이것은 다시 사람들 자신의 삶에 대한 줄거리를 제공한다. 목사들은 강해적으로 설교할 때 성경의 모든 책을 할 다룰 뿐만 아니라 청중에게 “하나님의 큰 그림”을 제공하려는 마음가짐으로 그리해야 한다. 이것이 구도자 친화적 설교이다.⁴⁾ 

위의 저자들과 교회 리더들은 포스트모던적인 사고를 지닌 자들이 진정성을 존중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진정성을 좋아한다. 강해설교야말로 진정성을 위한 것이다. 구성상의 포장보다 메시지에 더 초점을 맞추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가? 이사야가 예언한 것이 무엇인가? 바울이 쓴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 물음들에 대한 대답은 오늘날의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 교회에 모습을 보이는 비그리스도인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밝히 드러난 성경 진리이다. 그들이 그 진리에 동의하는지의 여부는 그들과 하나님과의 문제이다. 우리가 설교하는 내용은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⁵⁾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다가가라 

복음전도적인 설교를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많다. 성경의 장 절 구분을 알려주는 것이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성경에 수록된 책들의 목차를 알려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 교회를 방문한 불신자가 오바댜서를 금방 찾는 곁의 교인들을 볼 때, 그와 같은 안내가 그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겠는가! 

설교의 도입부에서 설교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그날의 성경 본문의 내용이 청중에게 어떻게 관련되는지 설명하면, 불신자와의 다리를 놓는 데 도움이 된다. 예컨대, 지난 부활 주일에 나는 누가복음 5장 33-39절에 대해 설교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다며 비방하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은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이 금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어 반박하신 후에,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새 포도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행복한가?”라는 제목을 잡았다. 이 도입부는 참되고 지속적이며 삶을 변화시키는 기쁨이 부할하신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있음을 설명할 기회였다. 이 도입부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나는 그러길 바라지만, 내가 보기에 그 2분 내지 3분의 시간은 불신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특별한 기회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우리가 모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한 별도의 안내가 필요할 수 있다. 

이 모든 “작은” 일들이 회중에게도 누적 효과를 준다. 설교단에서 불신자들에게 우호적으로 대함을 자각할 때, 신자들은 비그리스도인 친구들을 데려올 마음을 더 많이 갖게 된다. 복음 중심적이 된다는 것이 구도자에게 민감할 수 없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회심한 자들에게 설교하라 

불신자들을 향한 설교만큼 중요한 것은, 주일에 설교자에게 맡겨진 주요 과제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타깃으로 삼는 것이다. 그는 지역 교회를 세워야 하며,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에게 기꺼이 복종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주된 “청중”이다. 따라서, 나는 설교를 준비할 때 회심한 자들을 주로 염두에 둔다. 

그러면 설교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내용을 전해야 할까?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하며 바르게 하라 

요한을 통해 우리는 죄가 신자의 삶 속에 줄곧 존속함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이 구절은 신자들이 자신의 죄를 축소하고 자신의 성결함을 과대포장하며 주님을 부인하려는 유혹을 받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더욱이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한다(딤후 3:16). 따라서 목자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설교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반드시 책망하며 바르게 할 것이다. 

교인 수가 줄어들기를 바라는 목사는 없다. 하지만 성경에 충실하려면 적절한 책망이 불가피하다.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임무에 충실하자면, 우리가 설교하는 본문에 대해, “이 구절이 어떻게 교인들을 책망하거나 그들에게 도전을 주는가?”라고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은 기도하지 않음, 험담, 혹은 우상숭배를 책망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지역 회중에 따라 다르거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책망과 바르게 함이 없는 설교는 온전히 성경적인 설교일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라 

감사하게도, 회심자들을 향한 설교는 책망과 바르게 함 그 이상을 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자들을 격려하려는 노력을 뜻한다. 신자는 전적으로 말씀에 의존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 4:4; 신 8:3). 이는 그리스도인이 설교를 들을 때 생명의 말씀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음을 뜻한다.

물론 신자가 주중의 다른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할 수 있지만, 설교는 그의 영적 생존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디도서 1장 1-3절에서 바울은 어떻게 영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통해 드러나는지를 묘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설교를 통해 자양분을 얻고 존속된다. 모든 본문에서 제기할 수 있는 물음은, “어떻게 이 본문이 그리스도인을 지탱하고 유지하거나 격려하는가?”이다.

설교 사역을 하는 내게 다음 사실보다 더 큰 격려가 되는 것은 거의 없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나를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전해지는 말씀을 통해 얻는 생명이 필요해서이다. 설교는 교회가 나더러 준비하라고 맡긴 영적 양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백성을 존속시키고 자양분을 공급하며 세우며 훈계하도록 그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그 얼마나 귀한 특권인가! 

그리스도인들을 성결케 하고 강하게 하라 

성자께서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거룩해지고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아가게 되도록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분의 말씀을 받음으로 인해 온갖 종류의 고난과 조롱을 견뎌야 할 것을 알고 계셨다(요 17:14). 하지만 그분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기도하지 않으셨으며, 도리어 그들이 거룩해지기를 기도하셨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더 거룩해질까? 예수님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기도하셨다(요 17:17). 하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성결케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과 모든 성경 말씀을 이해하며 자신의 삶에 적용함으로써 거룩해진다(참조, 딤후 3:17). 거룩한 말씀이 거룩한 사람을 만든다.

물론 성화는 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은 신자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고(빌 2:13; 히 13:20-21),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갖게 하신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모아서 그분의 말씀의 진리들을 듣게 하실 때 일어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서로 “사랑과 선행”(히 10:24)을 행하도록 격려받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설교자들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데 쓰임받을 영광스러운 기회를 갖는다. 시편 1편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겨서 열매를 많이 맺는 튼튼한 나무에 비유된다. 이 비유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여호와의 율법 안에서 자양분을 얻고 즐거워할 때 열매를 맺고 강건하다. 설교는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도록 그리스도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설교자가 복 있는 사람을 만들지는 못하지만(감사하게도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백성에게 먹이는 귀한 특권을 받았다. 설교자는 매주, 매달, 매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여 나무를 튼튼하게 하는 시냇물과 같다.

월말에 가서야 장부 잔고를 보는 회계사나, 회사가 턴어라운드 될 때 장부 잔고를 보는 CEO와는 달리, 설교자가 맺히는 열매나 사람들의 변화되는 삶이나 감동받는 심령들을 항상 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목사가 행하는 최선의 일은 이생에서 평가될 수 없다. 그런 열매는 바구니에 모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는 엄연히 맺혀 있다. 설교된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은혜로 인해 죄인을 거룩하고 강건하게 하며 그들을 준비시켜 그들 자신의 은혜 사역을 감당하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하고 성장시키라 

제자들은 성경 이해와 해석에 있어 성장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설교 섭취에 있어 너무 부주의한 경향이 있다. 들은 내용이 참인지를 알기 위해 점검했던 사도행전 17장의 베뢰아인들과는 판이하다. 견실한 강해설교는 제자들에게 생각하고 점검할 사항을 도전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얄팍한 설교를 비판하면서, 제임스 W. 알렉산더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설교들에서 우리는 소중한 성경 진리들, 감동적인 예화들, 건전한 논거, 호된 훈계, 그리고 큰 위로를 많이 발견한다. 그 자체를 고려하면, 그리고 하나의 강연으로 보면, 흠잡을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성경 강해로서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다. 이 설교들은 영감받은 말씀의 난해한 부분들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 주제들을 폭넓은 시각으로 보게 하지 않는다. 이 설교들을 일평생 반복해도 회중에게 건전한 성경 해석을 전혀 가르치지 못할 수 있다.⁶⁾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며 그들을 성장시키는 설교는 반드시 듣는 이들을 들뜨게 하거나 이해하기 힘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그런 설교는 불성실하며 허망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며 그들을 성장시키는 설교는 성경 본문을 쏟아내는 설교이다. 설교 준비를 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목사는, “어떻게 이 본문이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을 주거나 그들을 성장시킬까?” 하고 물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체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마련이다(사 54:10-11). 설교자의 근면이 회중의 유익으로 보상받음에 따라 설교자의 노력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한 번에 몇 개의 절만을 설교하든 아니면 최근에 욥기를 설교할 때처럼 몇 개의 설교로 책 한 권 전체를 다루든, 성경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대학생들이 교회에 합류하고 있는데 이는 설교가 그들을 성장하도록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한 노부부가 최근에 내게 이르기를, 점심시간에 설교에 대해 영적 토론을 할 수 있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는 일에 뛰어나다고 말하거나 내 설교가 흥미진진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장해야 할 여지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열어서 선포하고 있으며, 그것은 흥미진진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충실한 설교를 찾고 있다. 성경에 충실한 설교는 책망과 바르게 함, 영적 삶의 존속과 격려, 성화와 강건케 함, 도전과 자라게 함을 수반한다.

비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설교를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논의를 마무리할 지점인 것 같다. 하지만 설교자들이 민감해야 할 범주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교회 멤버들이다. 

공동체적 몸으로서의 교회 멤버들에게 설교하라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회중의 대다수는 나름대로의 위치에서 어떤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설교자에게 있어 이 사실이 중요한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회중을 이렇게 묘사했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9). 그들은 단순한 제자들이 아니라, 골로새 교회에 뿌리내리고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는 제자들이었다. 골로새서 3장 15-16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말한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바울이 이 지역 교회를 한 몸으로 묘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연합됨을 그들에게 상기시켰음을 주목하라. 그들이 함께 모여 성경을 노래하고 성경 말씀을 들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개별적인 그리스도인들로서가 아니라 특정한 교회의 멤버들로서 언급한다. 그들의 모임이 연합을 가져온 것은 그들이 지리적으로 가까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같은 가르침과 같은 권면을 나눌 때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머리로 인식했기 때문에 같은 권위 아래에 있었다.

오늘날의 지역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구성원들을 단합시키는 방편들 중 하나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존 칼빈은 설교자의 직분을 묘사하면서 이 점을 언급했다. 설교자는 몸을 통합시키는 사람이다.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교회의 한 소망, 한 주님, 한 믿음, 그리고 한 세례(또는 침례)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해했다: 

이 표현들에서 바울은, 교회의 질서를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의 사역이 신자들을 한 몸으로 연합시키는 강력한 결속 사역임을 보여준다…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이러하다. 하나님은 사역자들을 통해 교회에 그분의 선물을 공급하시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그들과 함께하심을 보여주시며, 또한 교회가 무의미하고 무익한 존재가 되지 않게 하신다. 이런 식으로 성도가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의 몸이 교화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범사에 머리이신 그분에까지 자라가며 서로 결속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우리는 그분의 종들을 환영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멸시하지 않는다. 교회의 이 같은 질서를 제거하거나 그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 멸시하는 자는 누구든지 교회를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다.⁷⁾ 

많은 교회들이 멤버가 아닌 자들을 중시함으로써 성장하고 있는데, 공동체적 몸으로서의 교회 멤버들을 그토록 중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에서 볼 수 있듯이, 성경이 지역 교회의 일부인 개인들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복음을 나누는 가운데 존속되어 왔다. 이것이 교회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바울이 말했듯이,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한다(고전 12:26). 이것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서로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공동체이다.

성경적인 설교는 개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이 아니라 특정 지역 교회로서 서로에게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정규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설교할 성경 본문에 대해, “이 구절이 믿음 공동체로서의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까?”라고 자문하라. 교회 멤버들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 실제로 교회에 헌신하기보다는 장난삼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교회에 대한 강력한 비전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목사가 교회 구성원들에게 설교할 때, 그는 교회에 가입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며, 또한 교회 멤버들을 연합시켜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표하는 것이다. 

결론 

“설교자는 누구에게 설교하는가?”라는 물음을 생각하는 중에, 호주 칼턴에 위치한 성 유다 교회의 교구 목사인 피터 애덤의 말이 생각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이며 그의 말씀의 종이라면, 설교자의 소명은 하나님의 백성의 종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⁸⁾ 그렇다. 설교자가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에게 민감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만을 타깃으로 삼는다면, 설교 메시지가 방향을 잃거나 희석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영양실조에 걸린다. 이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다.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에게 설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로 초점을 맞추며 지역 교회에 헌신하는 신자들에게 정규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1) “Preaching to the Unchurched: An Interview with James Emery Whitein Preaching with Power: Dynamic Insights from Twenty Top Communicators, Michael Duduit 편저(Grand Rapids, MI: Baker Books, 2006), 227.

2) 위의 책, 230.

3) “Preaching to Postmoderns: An Interview with Brian McLarenin Preaching with Power: Dynamic Insights from Twenty Top Communicators, Michael Duduit 편저(Grand Rapids, MI: Baker Books, 2006), 126-27.

4) 이 줄거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강해 설교자들은 다음과 같은 소책자들을 참조할 수 있다: Mark Strom의 The Symphony of Scripture: Making Sense of the Bible’s Many Themes(1990), Vaughan Roberts의 God’s Big Picture: Tracing the Storyline of the Bible(2002), gospel and Kingdom(The Goldsworthy Trilogy, 2000). 이 성경신학 입문서들은 성경 말씀을 두루 설교해 나갈 때 성경의 통일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5) Nine Marks of a Healthy Church(Crossway, 2004)에 수록된 강해설교에 관한 Mark Dever의 글을 보라.

6) J. W. Alexander, Thoughts on Preaching(Carlisle, PA: Banner of Truth, Date), 239.

7) John Calvin,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oney Lane과 Hilary Osborne 편저(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6), 245.

8) Peter Adam, Speaking God’s Words: A Practical Theology of Expository Preaching(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6),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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