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신학

목회자여, 성화에 대한 자신의 신학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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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9.2016

성화에 대한 나의 이해가 부적절함을 감지했던 순간이 내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 어느 소그룹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거룩해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행위와 성령의 사역 간의 역학관계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이런 대화가 종종 그렇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던 것을, 혹은 그들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교회에서 배웠던 것을 얘기했다. 말하자면, 성경 읽기와 기도 등에 대해서였다. 동시에, 성령께서 성화에 실제적으로 관여하셨음을 모두들 일관되게 주장했다. 마지막에 한 솔직한 여성이 불쑥 말했다.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는지 나는 모르겠어요.” 

그녀가 그렇게 말한 데에는 배경이 있었다. 그 여성은 여러 해 동안 예수님을 따랐지만, 최근에 자신의 성장이 막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매주 주일에 교회에 나갔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악감정을 느꼈고 후회스런 말을 했다. 자신의 죄가 하나님을 근심하시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성결케 하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자신의 노력만큼 성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전혀 진전이 없었다. 그날 이른 저녁에 나는 우리의 영적 훈련을 성화의 직접적 원인으로 본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우리 자신에게로 초점이 바뀔 것이고 그러면 우리의 영적 성장에 손상이 온다는 사실을 묵상했었다. 나는 그녀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고, 그녀는 놀라면서도 어느 정도 공감을 표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구원에 대한 나의 이해가 단편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기적인 전체를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구원의 여러 과정들이, 예컨대 칭의와 성화 같은 과정들이 내 머릿속에서 상충되었다. 나는 일관되지 않은 말을 누구나 듣기 거북했을 정도로 오래도록 우물거리며 말하고 나서, 기분전환을 위해 대화를 멈추었다. 긴장을 완화하는 데에는 브라우니만한 게 없었다. 

목사의 책임 

내 아내와 유아인 딸이 결속하기 위해 엄마-유아 결속의 심리학을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듯이, 그리스도인이 성화되기 위해 굳이 성화의 신학을 자세히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도 그리스도께로부터 자양분을 얻고 잘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엄마-유아 결속에 있어 무엇인가가 잘못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을 돕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 결속을 잘 이해하는 누군가가 필요할 것이다. 

목사가 성화에 관한 신학을 알 필요가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당신은 “그것은 성경 상담자가 할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긴 하다. 하지만 목사들은, 특히 설교와 가르침을 주로 맡은 목사들은 교인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성화에 관한 참된 신학을 설교할 책임이 있다. 만일 우리가 교인들의 성결한 삶을 고려하지 않고 설교한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설교가 단순한 교육에 그치기를 원치 않으며 흥을 돋우는 식이 되는 것은 더욱 더 원치 않는다. 우리는 교인들이 변화되길 원한다. 그러면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패러다임을 갖추고 있는가? 갖추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교인들을 인도하고 있음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자주 범하는 잘못 

성화를 이탈하게 하는 위험 요인들은 방종과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는 성화를 내가 하는 일로 본다. 나의 구원을 얻기 위한 일을 내가 한다. 혹은 하나님의 은총을 더 많이 얻기 위한 일들을 내가 한다. “만일 내가 …을 중단하거나 …을 시작할 수 있다면, 나는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이 율법주의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잘못은 방종이다. 이를 따르는 자들은 율법폐기론자로 불린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성취된 사실을 너무 강조하며 우리 자신이 할 일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율법폐기론자들은 우리의 노력이 그릇 적용되었을 때의 끔찍한 실패를 보며, 그런 노력을 일체 중단해야 한다고 (그릇되게) 결론짓는다. 

성화를 위한 분명한 패러다임이 없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방종으로 율법주의와 싸우도록 혹은 율법주의로 방종과 싸우도록 교인들을 독려할 수 있다. 한 대학생 그룹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그들의 삶이 훼손될까봐 복음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죄를 짓는다는 사실이 자신이 율법주의자가 아님을 입증해주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별다른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성화가 아니며, 우리는 이런 부류의 생각을 독려해선 안 된다. 

가짜 성화를 조장하기는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어떤 목사들은 회중이 해야 할 모든 일을 회중에게 주지시키지만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에 대해서는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어떤 설교들은 은혜와 거룩한 삶이 전혀 연결되지 않는 까닭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라는 바울의 물음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듯하다. 이런 문제들은 모든 성경 본문의 중심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설교 접근법을 통해 교정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체의 욕심에 이끌리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물을 수 있도록 성화의 신학을 필요로 한다. 

설교할 때마다 성화 교리를 장황하게 강론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후에 한 문장으로 그 교리를 언급할 수도 있다. 혹은 예배당 입구에서 인사하면서 성화 교리와 관련된 말을 할 수도 있다. 요점은, 만일 “그리스도로 옷 입음”과 “위에 있는 것을 찾는 삶”이 우리의 성화와 관련된 주요 명령들이라면, 우리가 이 명령들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우리의 설교에서도 그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화 

그러므로 성화의 신학은 은혜를 경시하지 않고서 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성장의 필요성을 경시하지 않고서 은혜를 강조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리할 수 있을까? 나는 간략한 설명을 제시할 뿐이다. 이 아티클의 진짜 목표는 독자로 하여금 성화를 공부하게 하는 것이다. 첫 단계는 거룩함을 구원과 연결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구원 받는” 것과 “거룩한” 것이 서로 다른 별개인 것처럼 말해선 안 된다. 에베소서 2장 10절(“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을 생각하지 않고 2장 8-9절(“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만을 인용해선 안 된다. 구원은 성결을 포함하며, 거룩함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그 일부이다. 성경은 값없는 은혜와 선행 간에 아무런 긴장이 없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두 번째 사항은, 구원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종종 우리는 구원을 각각 따로 포장된 선물들로 여긴다. 예를 들면, “용서”, “성령”, “구속” 등의 선물들이다. 이 경우에 문제는 각 선물을 서로 별개로 여기고 한 선물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다른 선물을 도외시하게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용서”의 선물에 몰두하다보면 “성화”의 선물 꾸러미를 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혹은 “성화”에 몰두하다 보면 “전가된 의”에 굳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

사실상, 구원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과 직결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모든 선물이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주어지기 때문에, 이 선물들은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다. 죄 사함과 전가된 의는 우리가 가만히 물러나서 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거룩한 삶을 살 때, 우리는 칭의를 무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입게 하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한다. 성령께서도 그리스도인의 칭의와 거룩한 삶을 연결시키신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령께서(롬 4:25)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되게 하시고 성령의 열매로 우리를 채우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신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구원의 한 측면에서 성장하면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이 더 깊어지기 마련이며, 이 영적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모든 유익과도 연결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영적인 복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구원을 한 묶음으로 볼 때, 우리는 한 가지 유익을 다른 유익과 분리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방종으로 율법주의와 싸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주의와 방종 모두와 싸울 것이다. 

성화를 공부하라! 

나는 본 기사의 서두에 언급한 여성의 문제 제기를 감사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 때문에 내가 성화를 공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어느 정도 파악했든지, 우리가 더 이해할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더 경험할 것은 무한정하다. 그러나 성화를 위한 기본적인 패러다임만으로도, 그것이 성경적이라면, 그리스도를 더 깊이 만나며 거룩함 가운데 더 깊이 들어가도록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칭의를 강조하는 이들이 많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성화를 무시해선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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