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삶

내 생각이 변하게 된 경위-회중의 중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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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6.2010

고등학교 시절에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내게는 지역 회중의 역할이 늘 중요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첫 여름에 많은 시간을 교회 도서관에서 보낸 기억이 난다. 도서관에서 나는 교회에 새로 등록한 교인들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고 그것을 줄어드는 교회 출석 상황과 비교해서 도표화하는 작업을 도왔다. 내가 만든 것은 컴퓨터 이전 시대의 수작업 도표였는데, 포스터보드 상에 등록 교인과 출석 교인의 숫자를 각각 선으로 그어 표시한 것이었다. 그런데 1940년대 혹은 1950년대의 어느 지점에서 두 선들이 서로 현저하게 갈라졌다. 그 포스터에 그리고 거기 기록된 수치 계산에 들인 많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 벽에 걸려 있던 그 포스터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나는 어떠한 공식적 허락도 없이(허락을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것을 벽에 걸어두었었다. 그러나 그것을 내리는 것은 합당하고 신속한 공식 절차를 거쳐 집행되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라가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나의 이해가 대학과 신학대학원 시절을 거치면서 더욱 성장하게 되면서, 나는 교회에서 드러나는 명목성(nominalism)에 대해서도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회심”으로 알려진 많은 사례들이 내가 보기에 분명한 거짓이었다. 이처럼 부풀려진 수치로 제시되는 복음전도에 대한, 그리고 그처럼 안심하고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의혹은 더해 갔다. 

그러나 약 10년 전, 박사 과정을 밟는 동안, 내 생각은 교회라는 주제에, 특히 지역 회중의 중심성에 한층 더 집중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파러처치 사역을 하던 한 친구와 불편한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그와 나는 같은 교회에 출석했었다. 나는 그 도시로 처음 이주했던 때부터 그 교회에 가입했다. 그는 몇 년 후에 거기 출석만 했다. 그는 주일 아침 예배에만 참석하곤 했으며, 참석할 때에도 예배 순서가 절반 정도 지나고 설교 시간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그에게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특유의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자세로 대답했다. “나는 나머지 예배 시간에서는 얻는 것이 전혀 없어.” 나는 물었다. “너는 교회에 가입하는 것을 생각해본 적 있니?” 정말 놀랍게도, 그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교회에 가입한다고? 솔직히 나는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내가 무엇을 위해 여기 나왔는지 알고 있어. 저 사람들은 나를 느리게 할 뿐이야.” 그의 말은 냉담하게 들렸지만, 주님의 시간을 한 시간도 허비하고 싶지 않은 복음 전도자의 전형적인 진지하고 겸손한 어조를 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가급적 최선의 용도에 할애하길 원했으며, 교회에 가입함으로 인한 온갖 성가신 일들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겼다.

“나를 느리게 한다”는 그의 말이 내 생각 속에 맴돌았다. “나를 느리게 한다.” 내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갔지만, 내 입에서 나온 건 간단한 질문 하나였다. “하지만 네가 저 사람들과 교류하면, 그들이 너를 느리게 할 수 있지만 네가 그들을 도와서 속도를 높이게 할 수도 있지 않니?”  “그것이 그들을 향해 그리고 너를 향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들의 일부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니?” 대화가 계속되었지만, 내 생각에 핵심적인 얘기는 이미 끝났다. 하나님은 각자의 삶 속에서 우리를 사용하고자 하신다. 때로는 영적인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러하다. 

그 무렵에 나는 청교도주의를 공부하면서 엘리자베스 시대와 스튜어트 왕가 시대에 있었던 교회 정치(조직)에 대한 신학적 논쟁들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대토론이 특히 흥미로웠다. 본질적으로 목회적 권위는 목회적 관계에 결속되어 있다고 했던, 독립파 또는 회중교회주의파에 속하는 일부 참석자들의 주장에 내 마음이 끌렸다. 권징과 교리의 문제들에 있어 지역 회중이 최종적인 판결권을 갖는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설득력 있어 보였다(마 18:17; 고전 5장; 고후 2장; 딤후 4장 참조). 보통의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와 관련하여, 목사와 회중 모두의 역할이 새로운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내 마음속에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994년에 나는 담임목사가 되었다. 나는 항상 장로직을 존중해 왔고 이미 두 교회들에서 장로로 섬겼던 적이 있지만, 담임목사 역할을 맡게 됨에 따라 장로직의 중요성을 더 깊이 숙고하게 되었다. 야고보서 3장 1절, 히브리서 13장 17절과 같은 본문들이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같은 상황들이 나로 하여금 지역 교회의 중요성을 더욱 자각하게 했다. 언젠가 내가 읽었던 글이 기억난다. 존 브라운이 자그마한 회중의 목사로 새로 임명받은 한 제자에게 보낸 조언의 편지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자네의 공허한 마음을 나는 알고 있다네. 자네 교회의 회중이 주변 형제들의 그것에 비해 매우 작다는 사실 때문에 기분이 상할 걸세. 그러나 옛 성경 기자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심판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께 회중과 관련하여 보고할 때, 자네는 맡은 회중의 수효가 충분했다고 생각할 걸세.” 내게 맡겨진 회중을 돌아보면서, 나는 하나님께 보고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꼈다.

매주 사역을 할 때마다 이 교훈이 줄곧 내게 떠올랐다. 복음서들과 서신서들을 두루 설교해나가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대해 거듭 언급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함을 가르치는 본문들도 있지만(예, 살전 3:12) 사랑에 관한 다수의 구절들은 그리스도인들 서로간의 사랑에 대한 내용이라는 사실도 교인들에게 상기시켰다. 마태복음 25장을 본문으로 설교했던 때의 일이 기억난다. 그 설교에서 나는 냉수 한 잔을 주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한 것임을 설명했는데, 예배 후에 한 사람이 내게 와서 이르기를 내가 그녀의 “인생 구절”을 망쳤다고 했다.

하지만 내게는, “서로” 구절들(셩경에 그리스도인 서로를 향한 의무를 말씀하는 구절들, 예를 들면 서로 사랑하라, 서로 돌아보라, 서로 용서하라 등의 구절들을 말함-편집주) 모두가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했으며,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교회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진리들이 구체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에베소서 2-3장을 설교하면서, 나는 교회가 천상적인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시려는 그분의 계획의 중심에 위치함을 더 분명히 깨달았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교회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그 무엇임을 밝혔다(행 20:28). 그보다 일찍이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다시 사신 그리스도는 왜 그리스도인들 또는 교회를 핍박하느냐고 사울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그분의 교회와 동일시하셨기 때문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책망하셨다(행 9:4). 분명히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서, 그분의 희생에서, 그리고 그분의 지속적인 관심에 있어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어쩌면 이 내용은 지역 교회에 대한 설명이기보다는 교회론의 핵심에 대한 설명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한 주 한 주 성경 내용을 설교해나가면서, 나는 틴데일이 헬라어 ‘에클레시아’를 “회중”(congregation)으로 번역한 것이 좋은 결정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지역 교회를 구성하는 관계망은 우리의 제자화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삶의 현장이다. 사랑은 주로 지역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 회중은 이 사랑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나는 이런저런 교회가 끔찍한 곳임을 인식하고서 그리스도께로부터 멀어져 버린 친구들과 가족을 보았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삶으로 가르쳐주신 사랑, 즉 서로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이타적인 사랑을 교회에서 보고는 자연스럽게 그 사랑에 이끌려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친구들과 가족도 나는 보았다. 그래서 회중, 곧 말씀의 공명판으로서의 회중이 나의 복음전도 이해에 있어, 그리고 어떻게 기도하며 전도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에 있어 더욱 중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또한 회중은 다른 사람들의 참된 회심을 어떻게 분간할 것인지 그리고 우리 자신의 참된 회심을 어떻게 확신할 것인지에 대한 나의 이해에 있어 더욱 중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요한일서 4장 20-21절에 대한 설교 준비를 하다가 다음 말씀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야고보서 1장과 2장도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사랑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다. 

최근에, 회중의 중심성에 관한 생각이 내 마음 속에 지역 회중의 권징(형성적 권징과 교정적 권징)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만일 우리가 회중 가운데서 서로를 의지하려면, 제자화의 일부로서 권징이 있어야 하다. 만일 신약성경에 나오는 것과 같은 권징이 있으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을 알아야 하고 그들에게 헌신해야 하며 그들에게 우리를 알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권위를 신뢰해야 한다. 결혼 생활과 가정과 교회에서의 신뢰가능한 권위는 개별적인(지역적인) 차원에서 정해진다. 이것을 오해하고 권위를 싫어하며 기피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의 타락 동기와 유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와의 관계(권위와 사랑이 함께 있는 관계)를 재건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사역의 핵심에 매우 근접한 것이다.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을 왜 그토록 중요한 문제로 여겼는지를 이제 나는 대략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등록교인수와 출석수를 각각 연결한 그래프 선들이 서로 벌어지기 시작할 때 어떤 폐단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나는 알 수 있다. 교회 출석에 대한 결정을 전체 회중을 위한 주요 문제로부터 단순히 개인적인 결정의 문제로 격하시킬 경우에, 우리 회중이 그리고 한때 출석했던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지금 내 머릿속에 어지럽게 떠도는 여러 가지 의문들이 있다. 매주 다른 교회에 모습을 나타내는 “기독교 지도자들”, 회중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목사들, 그리고 실망한 소비자처럼 이 회중에서 저 회중으로 떠돌아다니는 가련한 양들에 대한 의문들이다. 앞으로의 10년은 지난 10년보다 더 나아지기를 소원한다.

편집자 주: 이 아티클은 원래 Jan/Feb 2002 issue of Modern Reformation에 게재된 것이며 허가를 받고 수정해서 여기 게재한 것이다. Modern Reformation은 www.modernreformation.org.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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