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삶

교회 지킴이와 가이드로서의 성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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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2014

성경신학은 성경읽기의 한 방법이다. 이것은 해석학에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성경의 여러 기자들과 여러 책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한 가지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고 본다.

다소 학술적으로 들리는가? 그러나 성경신학적 신학 훈련은 교회를 지키며 바른 길을 안내하는 데 필수적이다. 성경신학은 거짓된 이야기들과 그릇된 길로부터 교회를 지켜준다. 또한 더 나은 설교와 더 나은 실천과 더 나은 길로 안내해준다. 

교회 지킴이로서의 성경신학 

예컨대, 자유주의 신학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구원 기사를 경제적 불의, 자기중심적인 정치세력 등을 타파하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개조한다. 그런 구속적 스토리들이 모두 그릇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내 딸들 중 하나가 자기 자매와 싸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 아이가 참말도 하지만 자세한 얘기를 생략하거나 강조점을 달리하기도 한다. 성경의 복음 스토리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이 바로 그러하다.

로마 가톨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로마 가톨릭은 사제와 성례들이 중재적 역할을 하는데, 이는 옛 언약의 냄새를 많이 풍긴다.

현세적인 축복을 강조하는 번영복음의 경우에도 옛 언약의 요소들을 새 언약으로 가져온다.

그런가 하면, 구속적인 미래를 현재로 가져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때 완벽주의적 재세례파들은 하늘을 속히 지상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이 한 세기 전에 이 일을 시도했다. 요즘은 문화 변혁에 몰두하는 이들이 성경 기사를 교묘하게 개조한다.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기독교” 사이비 종파들이든 아니면 사회복음, 해방신학, 미국 메시아주의, 또는 근본주의적 분리주의의 몇몇 형태들과 같은 교회 내의 운동이든, 열거할 것들이 이외에도 많다. 그 심각성의 정도가 덜한 것과 더한 것의 차이일 뿐이다. 

요점은, 균형을 잃은(혹은 거짓된) 복음들과 균형을 잃은(혹은 거짓된) 교회들이 성경 서사에 대한 개념이 없는 “증거 본문들”에 근거하고 있거나 빗나간 성경 스토리에 근거하고 있다. 즉, 성경의 주요 언약들을 잘못 연결시키거나, 연속성이나 비연속성을 지나치게 내세우거나, 모형과 원형을 분간하지 못하거나, 혹은 종말론을 덜 이해하거나 지나치게 강조한다. 또는 현재 지상에서 하늘을 약속하거나 지금 몸과 분리된 영적 삶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각 경우에서, 나쁘거나 균형을 잃은 성경신학이 나쁘거나 균형을 잃은 복음을 전하며, 그런 복음이 나쁘거나 균형을 잃은 교회를 만든다.

반면에, 좋은 성경신학은 복음을 보호하고 교회를 보호한다. “튼튼한 성경신학이 가장 터무니없는 단순화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안전하게 지킨다”라고 D.A. 카슨은 말한다.

이는 (ⅰ) 좋은 성경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ⅱ) 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나쁜 성경신학들을 파악하는 것이 목사의 임무임을 뜻한다. 오늘날 번영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 그런 가르침이 왜 나쁜지를 당신은 설명할 수 있는가? 

교회의 가이드로서의 성경신학 

성경신학이 단순한 지킴이만인 것은 아니다. 가이드이기도 하다. 좋은 설교, 좋은 전도 사역, 좋은 공예배, 좋은 교회 조직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삶으로 인도하는 가이드이다. 

좋은 설교로 인도하는 가이드 

성경 본문을 연구하며 설교를 준비하려고 앉을 때, 성경신학은 균형 잃은 증거 본문을 채택하거나 균형 잃은 구속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도록 막아준다.

성경신학은 각 본문을 올바른 성경적 문맥 안에 두며, 해당 본문이 그리스도의 인격 및 사역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알 수 있게 도와준다. 또한 도덕주의를 차단하여 기독교적인 설교를 하게 한다. 성경신학은 직설법과 명령법을, 그리고 믿음과 행위를 올바로 연결시킨다. 복음주의적 강해를 가르쳐준다. 성경신학은 모든 설교가 큰 이야기의 일부임을 분명히 한다.

요컨대, 목사 직분의 가장 중요한 일, 즉 하나님 말씀을 설교하며 가르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신학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더 상세한 내용은, Jeramie Rinne의 Biblical Theology and Gospel Proclamation을 참조하라. 

좋은 전도사역으로 안내하는 가이드 

교회 밖의 세상으로 다가가서 전도하고 사역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면, 성경신학은 너무 많은 기대와(실현된 종말론에 대한 지나친 강조) 너무 적은 요구(값싼 은혜, 안일한 믿음주의, 믿기도 전에 소속되기, 명령법 설교 회피) 간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게 한다.

좋은 성경신학은 현재적 삶의 형통을(그것이 건강과 물질적 부이든, 도시의 변화든, 엘리트층의 지지 확보든, 미국 재건이든) 약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과 공의를 위해 문화에 개입하며 도시의 유익을 도모하는 일을 기피하지도 않는다.

성경신학은 말로 다가가는 것을(복음전도와 선교) 우선시하지만, 말과 행동을 그릇되게 분리시키지 않는다.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다윗을 거쳐 그리스도에 이르는 줄거리가 분명히 보여주듯이, 말과 행동은 교회의 증언과 선교에 있어 불가분적이다. 

좋은 공예배로 안내하는 가이드 

언약궤가 들어올 때 옷을 벗고 추었던 다윗의 춤이 교회 모임을 위한 표준인가? 구약의 제사장들이 사용했던 향이나 악기와 찬양대 활용이나 여러 성일들에 드렸던 “희생제사들”이나 혹은 성경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일은 어떠한가? 올바른 성경신학은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들여올 것과 들여오지 말 것이 무엇인지를 분간하도록 도와준다.

두 언약들의 연관성, 연속성과 불연속성,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역,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해야 할 일 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공예배의 많은 부분이 의존된다.

이들 모두가 이론적인 것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목사의 일들은 성경신학에 의존하는 면이 많다. 이 점을 철저히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더 많은 자료를 원한다면, Bobby Jamieson의 논문인 “Biblical Theology and Corporate Worship”을 보라. 

좋은 교회 조직들로 안내하는 가이드 

성경의 줄거리는 교회의 조직들을 위해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연속성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멤버십과 권징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불연속성의 측면에서 보면, 새 언약에서의 하나님 백성의 리더들은 옛 언약에서와는 달리 극적으로 변했다.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 전부가 제사장이 된다. 둘째로, 장로들은 말씀으로 양떼를 먹이는 하위목자들이다.

어떻게 교회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성경신학에 의존하는 것이 분명하다. 멤버십이 단지 신자들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까지 포함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할례와 세례(또는 침례)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시각에 의존한다.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삶으로 안내하는 가이드 

끝으로,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삶을 위해, 그리고 그 삶이 지역 교회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성경신학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출애굽 이야기에서 구속은 집단적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구속은 개인적이다. 과연 그러한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에서 성취하신 일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의존한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벽이 무너졌음을 그리고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해지는 순간에 “한 새 사람”이 만들어졌음을 주장한다(회심의 집단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에베소서 2장 11-22절을 보라).

만일 신약성경에서 개인의 구원 경험이 출애굽 때와는 달리 각기 다른 시기에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이 구원이 구약성경에서만큼이나 한 백성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집단적이라 할 수 있다. 성장도 집단적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삶도 집단적이다. 나를 양자로 삼은 분은 아버지이시지만, 그가 나를 한 가족으로 삼으셨고, 따라서 그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의 다른 자녀들과 형제자매가 됨을 뜻한다. 

교회의 가르침과 친교와 문화를 위해, 이 집단적 실체는 엄청나게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지역 교회의 주요 존재 목적은(만일 이 성경신학적 설명이 올바르다면) 단지 교회가 되는 것이다. 새 가족, 새 백성, 새 나라, 새 문화, 새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성장의 많은 부분은 내가 개인 경건의 시간(quiet time)에 무엇을 하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입는 것을 어떻게 배우는지에 관한 것이다.

(일부 보수적인 신학자들이 하듯이) 몸을 희생시키고서 개인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하듯이) 개인적인 책임을 무시하고서 집단적, 사회적 구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성경신학을 상상하기가 쉽다.

성경의 줄거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동료 구성원들의 의, 죄에 대한 승리, 영적 치유, 깨진 관계의 회복에 대해 적절한 기대와 관심을 갖도록 도와준다. 성경의 줄거리는 당신이 당신이나 다른 이의 삶 속에서 비극과 악을 맞닥뜨릴 때 그것에 대한 당신의 접근 방식을 형성할 것이다.

달리 말해서, 올바른 성경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미/그러나 아직”이라는 비전으로 인도한다. 너무 많은 “이미”나 너무 많은 “그러나 아직”에 치우치기 쉽다. 

요점: 올바른 성경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특히 지역 교회와 관련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신뢰할 만한 가이드를 제시한다. 또한 그것은 그릇된 강조, 그릇된 기대, 그릇된 복음으로부터 교회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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