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온유함이 약한 것인가?-온유함에 대한 목회적 고찰

아티클
05.23.2016

“목사”라는 직함을 들을 때 당신의 머리에 처음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인가? 내 짐작으로, 그것은 “온유함”이 아닐 것이다. 대중적인 영웅들은 온유함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은 순전히 힘과 기술과 의지력을 통해 큰 업적을 달성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겸손보다는 자만심이 특출나다. 

나는 늘 내가 온유하다고 생각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덕목들의 목록을 읽을 때, 나는 온유함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젊은이로서 나는 정욕에 대항하는 기도를 정규적으로 했다. 교만과 싸웠다. 게으름을 막고자 노력했다. 이 치명적인 죄들은 내가 대항해야 하는 머리 셋 달린 괴물이었다. 그러나 내가 케르베로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을 지키는 개로서 머리가 셋이고 꼬리는 뱀이다-역자주)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동안, 자그마한 죄가 내 마음에서 빠져나가 후방에서 몰래 나를 공격했다. 그 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가혹함, 급함, 자신의 뜻을 오만한 형태로 주장함 등. 그것은 부드럽지도 온유하지도 않다. 

내가 어떻게 이 죄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한 형제가 용감한 일을 했다. 그는 내가 거칠고 위협적일 수 있음을 내게 알려주었다. 내가 너무 거칠기 때문에 그는 우리 교회의 장로 모임에서 나랑 함께 일할 수 없겠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형제는 지혜롭고 경건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나와 교회를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나의 죄가 나를 속였다 

우리는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 형제더러 이 정보를 함께 나누기에 편안하다고 느끼는 두 명 정도의 장로들을 알아보게 했다. 그 후 넷이서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며 기도했다. 그는 그들에게 그의 생각을 말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도 고백하면서 겸손히 그렇게 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중에, 나는 나의 대화 방식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투였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종종 내가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으면서 최대한의 결과를 얻으려 했음을 깨달았다. 나의 정욕과 게으름과 교만은 대체로 점검되었던 반면에, 거친 모습은 더욱 심해져 갔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이 죄를 그토록 오래도록 파악하지 못했는지 의아했다. 나는 정규적으로 기도했고, 성경을 매일 읽었으며, 매주 한 번 이상 설교했다. 나는 전체 회중의 죄악을 지적하기 위해 따로 구분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부주의하게도 나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했을까? 

이에 대한 짤막한 대답은, 내 죄가 나를 속였다는 것이다. 19세기 신학자 아치발트 알렉산더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죄 안에서 마음은(mind) 기만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다. 올바른 생각과 동기들은 잠시 잊히거나 압도당한다.” 그의 말이 옳다. 나는 나의 리더십 스타일의 일부가 직설적일(이는 거칠다는 것보다는 더 듣기 좋은 말이다) 뿐이라는 기만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여러 주가 지나면서, 주님은 성화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정임을(목사들에게도 마찬가지임을) 상기시켜주셨다. 이뿐만 아니라, 나는 그 고마운 형제의 예리한 권면 속에서 히브리서 3장 13절의 힘을 발견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그의 권면은 내 마음을 새롭게 점검하게 해주었다. 

성경이 새롭게 이해되었다 

그 형제의 지적 덕분에 나는 새로운 눈으로 성경을 읽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예전에 모세를 기억할 때, 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기 위해 큰 불안감을 극복했던 담대한 리더를 먼저 생각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모세는 열정적으로 공의를 수호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모습 전부는 아니었다. 나 자신의 거친 모습을 대면할 때, 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인격적으로 강력히 변화되었던 모세를 보았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 “온유함이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고 묘사한다(민 12:3). 

예전에 성령의 열매를 묵상할 때, 나는 희락과 충성과 절제에 있어 부족한 내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제는 온유라는 성령의 열매에 내 마음을 집중한다(갈 5:22-23). 

예전에는 교회 장로들의 역할을 파악하기 위해 베드로전서 5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들이 탐욕을 부리지 않고 기꺼이 종이 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특별히 주목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 두드러져 보였다(벧전 5:3). 

나는 감독직에 꼭 필요한 자격을 숙고하느라고 디모데전서 3장을 여러 차례 읽었다. 신실한 결혼생활, 술 취하지 않음, 그리고 존경받을 만함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라는 문구를 보지 않고는 그 구절을 읽지 못한다. 

교회는 온유한 목사를 필요로 한다 

교회를 이끄는 것은, 여러 장로들의 협력이 있어도 쉽지 않다. 좋은 목사는 비판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더욱이, 목사들은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한 비전과 확신과 결단과 굳센 의지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기대된다. 그리고 때로는, 죄악의 구름으로 덮인 마음 때문에, 우리 목사들은 온유라고 하는 덕목이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미국이 온유한 대통령을 필요로 하지 않고, 군대가 온유한 장군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기업체가 온유한 CEO를 필요로 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아마도 인정하진 않겠지만, 우리는 우리 교회가 온유한 목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교회는 국가나 군대나 기업체가 아니다. 만일 정치가나 장군이나 CEO가 이끄는 교회를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그렇게 되도록 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 가운데서 교회의 장래를 자신의 연약함을 민감하게 인식하는 장로들에게 맡기셨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만일 예수님이 자신을 비워 세상을 구원하셨다면(빌 2:7), 모든 장로들도 그분을 본받아야 한다. 

남편으로서, 나는 결혼생활에서의 온유함에 대해 언급한 데이브 하비(Dave Harvey)의 말에 감사한다. “온유는 약함이나 수동적임과는 무관하다. 온유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힘이다…결혼생활에서 온유한 것은 약한 것이 아니라 배우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정도로 그에게(그녀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이것은 목회에도 적절한 말이다. 

온유는 나약함이 아니다. 자신의 은사를 발휘하여 교회를 위대하게 만들 능력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목사는 복음의 능력을 과소평가한다. 자신이 가장 통찰력 있어야 하고 가장 예리해야 하고 가장 강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사, 혹은 가장 권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사는 가장 기본적인 영적 진리를 놓치고 있다. 하나님은 가장 온유한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기뻐하시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가장 확실히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과묵하여 적극적으로 인도하지 않거나 자신의 판단에 회의적인 사람이 좋은 목사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함을 뜻한다(약 1:19). 

나는 온유함에 있어 여전히 부족하지만, 거칠어지려는 내 성향을 자각하고 있으며 그런 자각이 더 나은 남편과 아빠와 목사가 되게 함을 알고 있다. 언젠가는 내 사역이 끝날 것이다. 내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보다는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기를 나는 바란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기억하는 한, 나는 온유함의 본을 보인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온유함으로 나아가기 

우리 중의 누구도 충분할 정도로 온유하진 않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 문제에 있어 심각한 상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사랑으로 진실을 당신에게 말해줄 사람을 찾아서, “내가 온유한가요?”라고 그에게 물어보라. 내가 정말 집중할 필요가 있는 영역이 온유함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내게 도움이 되었다. 아는 것이 전투의 절반을 이룬 건 아니겠지만, 그것은 전투의 시작이다. 
  • 핵심 성경 본문들을 묵상하라: 잠언 15:4; 마태복음 5:5; 갈라디아서 5:23; 에베소서 4:1-3; 골로새서 3:12; 디모데전서 6:11; 야고보서 1:21.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생각하라.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고 했다. 이는 우리도 그분의 온유하심을 공유하게 됨을 뜻한다(고후 10:1; 마 11:29). 이런 구절들을 깊이 묵상하면 온유함을 더욱 갈망하기 마련이다. 
  •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생각하라. 만일 당신의 말과 어조와 표정이 가혹하거나 냉담하게 나온다면,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 방법을 재고하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당신이 그를 배려하고 있음을 확실히 알게 하는 것이다. 때때로 부드러움의 결여는 당신의 진심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능력에 흠결을 가져온다. 
  • 더 온유해지게 해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분명 이것은 하나님이 응답하길 기뻐하시는 기도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양들을 당신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신다. 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을 드러내기를 진심으로 갈망하는 하위목자들의 심령 속에 온유함을 불어넣어주실 것이다.

 

  1.  Archibald Alexander, Practical Truths(Harrisonburg, VA: Sprinkle, 1998), 59.
  2.  Dave Harvey, When Sinners Say, “I Do”(Wapwallopen, PA: Shepherd Press, 2007),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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