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신학

성경신학과 섹슈얼리티 위기

아티클
08.20.2014

요즘 서구사회는 도덕적 혁명이라 묘사될 수 있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도덕률과 특정 문제에 대한 집단적인 윤리적 평가는 가벼운 수정이 아니라 완전한 반전을 보여 왔다. 한때 정죄되었던 것이 이제 찬사를 받고, 이제 그러한 찬사를 거부하는 것이 정죄된다.

지금의 도덕적, 성적 변혁을 예전의 도덕적 변혁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전례 없는 변화 속도이다. 예전 세대들은 수십 년에(심지어 수백 년에) 걸쳐 도덕적 변혁을 경험했다. 반면에 지금의 변혁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 변혁에 반응하면서, 교회는 성에 대한 지금의 논의로 인해 돌이킬 수 없고 불가피한 신학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위기는 영지주의가 초대교회를 위협했던 또는 펠라기우스주의가 어거스틴 당시의 교회를 위협했던 것과 같은 유형의 신학적 위기에 해당한다. 달리 말해서, 성의 위기가 복음, 죄, 구원, 그리고 성화에 대한 교회의 이해에 도전을 제시한다. 새로운 성을 주창하는 자들은 성경의 거대서사(metanarrative)를 완전히 재작성할 것을, 신학을 완전히 재조정할 것을, 그리고 교회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성구사전에 “트랜스젠더”가 나오는가? 

증거 본문 찾기는 신학적 오류 수정과 재진술 전략을 모색하는 보수적인 프로테스탄트들의 첫 번째 반사작용이다. 이것은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의 당연한 반사작용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무오하고 오류불가인 하나님 말씀으로 믿기 때문이다. B. B. 워필드가 말했듯이, “성경이 말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라고 우리는 이해한다. 나는 이 반사작용이 전적으로 그릇되진 않지만 전적으로 옳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전적으로 그릇되진 않은 이유는 특정한 성경 구절들, 즉 “증거 본문들”이 특정 주제들에 대해 직접적이고도 입증 가능한 방법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유형의 신학적 방법(내가 “성구사전식 반응”이라 부르는 방법)에는 분명한 제한이 있다. 당신이 씨름하는 신학적 문제에 해당하는 단어가 성구사전에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는가? 가장 중요한 신학적 문제들 중에는 관련 단어나 구절들을 성구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성구사전에서 “트렌스젠더”를 찾으려고 해보라. “레즈비언”은 어떤가? 혹은 “시험관 수정”은? 이들은 성구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이는 성경이 불충분하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성경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성경 접근법의 실패이다. 신학에 대한 성구사전식 접근은 문맥이나 언약 또는 주요서사(master-narrative)가 -이들은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세 가지 해석학적 기초들이다- 없는 단조로운 성경 이해를 낳는다. 

몸에 대한 성경신학 

교회가 오늘날의 섹슈얼리티 위기(sexuality crisis)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성경신학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교회는 주요서사 속에 담긴 그리고 언약적 경로를 따라 점진적으로 계시되는 문맥을 통해 성경을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창조, 타락, 구속, 그리고 새 창조라고 하는 성경의 거대서사를 통해 각각의 신학적 주제를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특히, 복음주의자들은 성경 자체의 구속 드라마 전개에 근거한 몸의 신학(theology of the body)을 필요로 한다. 

창조 

창세기 1장 26-28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사람을 만드셨음을 알려준다. 또한 이 본문은 하나님이 사람을 몸을 지닌 존재로 만드셨음을 알려준다. 창세기 2장 7절도 이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이는 우리가 사람이기 전에 몸이었음을 나타낸다. 몸은 우리의 인간 존재에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번성하여 땅을 다스리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라 그들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후손들을 낳는 임무가 수행되었다. 

또한 창세기 기사는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함을 알려준다. 아담은 배고플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동산의 열매를 주셨다. 이 같은 필요는 아담이 유한하고 의존적이며 피조된 존재임을 나타낸다.

또한 아담은 동반자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아내인 하와를 주셨다. 아담과 하와 둘이서 몸의 생식 능력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번성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생들로 땅을 채우는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 부부는 둘이서 한 몸이 됨으로써 몸의 쾌락을 경험했다.

창세기 기사는 성별(gender)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성별은 협의에 따라 달리 변경될 수도 있는, 단지 사회적으로 강요된 구조가 아니다.

창세기는 성별(gender)이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임을 가르친다. 성별은 인간 번성을 위한 것이며 창조주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 존재할지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과 같다.

요컨대,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몸을 지닌 존재로 지으셨다. 몸을 지닌 존재로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섹슈얼리티를 선물로 받아 청지기로서 관리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를 증거하는 방식으로 창조되었다. 

또한 창세기는 이 모든 사실을 언약적 관점에서 제시한다. 인간의 생식은 종족 번식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읕 통해 반영되는 그분의 영광으로 땅을 가득 채우기 위해 후손을 늘려야 했다. 

타락 

구속사에서 두 번째 전환점이 되었던 타락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인 몸을 부패시켰다. 죄가 들어옴으로써 몸이 죽을 운명에 놓였다. 성과 관련하여, 타락은 성적 상보성에 대한 하나님의 좋은 계획을 망가뜨렸다. 하와는 남편을 다스리려 했다(창 3:16). 아담의 리더십이 손상되었다(3:17-19). 하와는 출산의 고통을 경험했다(3:16).

이어지는 기사들(narratives)은 일부다처제로부터 강간에 이르기까지, 정도에서 벗어난 성적 타락의 진전을 보여준다. 이 사실을 성경은 솔직하게 보도한다. 이 창세기 기사들에 이어 율법 수여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율법은 정도에서 벗어난 성적 행위를 억제하기 위해 주어졌다. 그것은 올바른 성적 행위를 규정하고 성도덕, 여자가 남자 옷을 입고 남자가 여자 옷을 입는 형태, 결혼, 이혼, 그리고 몸과 성에 관한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지침을 분명히 선언한다. 

또한 구약성경은 성적인 죄를 우상숭배와 연결시킨다. 주신 숭배(orgiastic worship), 성전 매춘, 기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을 끔찍하게 왜곡하는 행위들은 모두 우상숭배로 간주된다. 바울도 로마서 1장에서 그렇게 연결시킨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 1:25).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롬 1:26-27). 

구속 

구속과 관련하여, 우리는 우리의 구속의 가장 중요한 측면들 중의 하나가 그 구속이 몸을 입으신 구주를 통해 실현되었다는 사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 참조, 빌 2:5-11). 인간 구속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실현되었다. 그분은 영원히 성육신의 상태로 계신다.

바울은 이 구원이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도 포함한다고 말한다. 로마서 6장 12절은 우리의 “죽을 몸”을 지배하는 죄에 대해 말한다. 이는 육체적 부활에 대한 장래의 소망을 암시한다. 로마서 8장 23절은 우리의 종말론적 소망의 일부가 “우리 몸의 구속”임을 알려준다. 현재 진행되는 성화의 삶에서도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는다(롬 12:2). 또한 바울은 구속함 받은 몸을 성령의 전으로 묘사한다(고전 6:19). 우리는 성화의 영향이 몸에도 미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신구약 성경의 성윤리가 우리의 성과 관련된 행위들을 규제한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음행과 모든 종류의 성적 부도덕을 단호히 정죄한다. 또한 바울은 성적인 죄, 즉 몸에 범하는 죄(고전 6:18)가 교회와 복음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고린도 교회에게 분명히 밝혔다. 그것을 지켜보는 세상 사람들이 복음의 효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고전 5-6장). 

새 창조 

끝으로, 구속 드라마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그것은 새 창조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2-57절에서 바울은 새 창조로 인해 우리의 몸이 부활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이 우리 몸의 부활의 소망을 위한 약속이며 능력임을 밝힌다. 부활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몸 안에서 경험할 것이다. 예수님의 몸이 지상 생애 동안의 몸과 같지만 완전히 영화롭게 되었듯이, 우리의 몸도 현재 모습의 연장선상에서 온전히 변화될 것이다.

새 창조는 에덴동산의 단순한 복원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에덴보다 더 나을 것이다. 칼빈이 설명했듯이, 새 창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주로서만이 아니라 구속주로서도 알게 되며, 그 구속은 우리의 몸을 포함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고서 만유의 주로서 다스리시듯이, 우리도 몸을 입고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새 창조에서 성별(gender)은 남아 있으나 성적 행위(sexual activity)는 없을 것이다. 부활 때 성(sex)이 무효화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다. 결혼과 성적 행위를 통해 예표되었던 어린 양의 종말론적 결혼 잔치가 마침내 펼쳐질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와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로 더 이상 땅을 채우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신에,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온 땅을 가득 채울 것이다. 

성경신학의 필요불가결성 

많은 목사들이 섹슈얼리티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신학적 방법을 적절히 동원하는 데 실패해 왔다. 성구사전이나 찾아보고 생각해보는 정도로는 오늘날 설교단에 필요한 유형의 엄밀한 신학적 사고를 할 수가 없다. 목사들과 교회들은 성경신학의 필요불가결성을 명심해야 하며, 성경 자체의 내적인 논리에 따라 성경을 읽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것은 창조로부터 새 창조까지 나아가는 이야기의 논리이다. 우리 앞에 커다란 해석학적 과제가 놓여 있지만, 그것은 또한 문화에 대해 신실하게 복음전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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