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삶

문화적 위기에서 살아남는 법

으로 마크 데버(Mark Dever)

마크 데버(PhD,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워싱턴 DC에 있는 Capitol Hill Baptist Church의 담임 목사이자, 9Marks(9Marks.org)의 대표직을 맡고 있습니다. 데버는 십수 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으며, 전국적인 컨퍼런스의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워싱턴 디시에서 아내 코니와 함께 살고 있으며, 슬하에 성인이 된 두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아티클
10.24.2014

동성 결혼에 대한 여론이, 그리고 미국의 법률들이 변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변화는 더 큰 변화의 흐름 속의 하나일 뿐이다. 가족, 사랑, 성, 관용, 하나님 등에 대한 미국의 견해는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방어 태세를 취하게 하는 방향으로 내닫고 있는 것 같다.

알버트 몰러(Albert Mohler)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새로운 “도덕적 법익 피박탈자”가 되어가고 있다. 역사적 기독교 원칙을 옹호하는 사람은 점점 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는 형법적으로도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입장으로 돌이키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직이나 다른 징벌의 위협이 제기됨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견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당황하여 움츠러들거나, 불필요한 우려를 자아내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만큼, 우리는 비성경적이며 명목상의 기독교를 지녔음을 드러내는 셈이다.

여기서는 현재 우리에게 닥친 매우 실제적인 문화적 변화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곱 가지 원칙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1. 교회가 초자연적인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존재함을 기억하라

기독교 신앙 전체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새 생명을 주신다고 하는 진리에 근거한다. 복음을 전할 때마다, 우리는 공동묘지에서 전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시기나 문화는 전혀 없었다. 그런 문화는 존재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과 특히 목사들은 언제나 우리가 초자연적인 일에 관여하고 있음을 뼛속 깊이 알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최근의 문화적 변화는 우리의 일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2. 핍박이 정상적임을 이해하라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요한복음을 두루 설교해 왔는데, 핍박 주제를 제기한 데 대해 여러 교인들이 내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나는 내 설교가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인들의 귀가 변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광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나의 오래된 설교들, 예를 들면 1990년대에 베드로전서에 관해 설교했던 내용을 되짚어보면, 성경 강해에서 핍박 주제가 반복적으로 제기됨을 알 수 있다.

핍박은 타락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다(예를 들면 요 16장).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을 바쳐서 예수님께 순종함에도 불구하고 모욕이나 핍박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근사한 교회 건물들에 현혹되지 말라.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국가적인 범죄자로 처형당하셨다. 

내 동료 목사들 중 하나가 최근에 고찰한 바에 따르면, 기독교 핍박 역사에서 핍박을 초래한 ,것은 복음이 아니라 부차적인 문제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핍박자들은 “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으니 내가 너를 핍박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장하는 어떤 신념이나 관행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상반되거나 그들의 세계관을 위협하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를 반대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문화 변화에 대해 당황하여 움츠러들거나 불필요한 우려를 자아내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만큼,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위배하는 셈이다. 그것은 우리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목사들은 불쌍한 척 청승떨지 않도록 회중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핍박이 정상적이라는 내용을 정규적인 설교와 기도에 포함시켜야 한다. 설령 사회적인 비판이나 특권 상실이나 재정적 불이익이나 혹은 형법상의 핍박이 따르더라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도록 교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3. 유토피아주의를 삼가라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정의의 사람들이어야 하며, 이는 우리가 유치원 학급이든 한 국가든 자신이 속한 곳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항상 노력해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과 정의를 위해 일하지만,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나라로 변화시키진 못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 임무를 우리에게 부여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언젠가 이 세상을 완벽하게 만드실 분을 알리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된 사명으로 부여하셨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간다. 만일 유토피아주의의 유혹을 받는다면, 성경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음을, 그리고 가장 열정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랐던 일부 사람들마저 유토피아주의에 미혹되어 곁길로 빠지게 되었던 역사적 사례들에 유념하라.

점점 더 죄악을 용인하는 추세가 굳어지고 있는 우리 시대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요즘의 문화적 변화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이유들 중 하나는 어느 정도 유토피아적인 소망을 지녔기 때문이다. 굳이 불필요한 우려를 자아내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생각만큼, 유토피아적인 생각 또한 그릇된 길로 유도한다.

4. 민주적인 청지기 직분을 활용하라

누군가가 내 설명을 읽고서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으로나 정부에 대해 무슨 일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결론을 내린다면, 나는 서글퍼질 것이다. 바울은 정부에 복종할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우리의 민주적인 상황에서는, 정부에 복종하는 일에는 그 권위에 관한 우리의 몫을 간과하지 않고 권위를 함께 공유하는 것도 포함된다. 우리가 정부의 권위를 공유한다면, 정부의 폭압 정치에 대한 책임이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도 있다. 민주적인 절차가 우리 손에 있는 한,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곧 청지기 직분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만들 수는 없지만, 이것이 우리가 지닌 것을 잘 관리하는 선한 청지기일 수 없음을 뜻하거나, 혹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민주적인 절차를 활용할 수 없음을 뜻하는 건 아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해, 우리는 민주적인 청지기 직분을 사용해야 한다.

5. 인간적인 환경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결코 없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에서도 아버지를 의지하셨다(히 12:2). 우리에게 닥칠 그 어떤 상황도 우리의 왕께서 당하신 고난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의지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가 견뎌야 하는 모든 상황을 통해 자신의 신실하심을 입증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증언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6.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라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건 지옥이 아닌 이상 전부가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지닌 모든 것은 은혜에 속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훼방하는 고용주, 친구들, 가족 구성원들, 그리고 정부에 대해 너무 심한 악감정을 갖지 않기 위해 그런 관점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바울이 감옥에서 노래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무엇을 용서받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더 큰 실재들을 인식하며 소중히 여겼다.

7. 그리스도의 확실한 승리 안에서 안식하라

지옥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사탄이 동성 결혼을 조장하려는 모략 따위를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싸움에 최종적으로 승리하기라도 한 것처럼 두려워 떨 필요가 없다.

“우리는 여기서 결국 패배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결코 그렇지 않다.

현재 세계 도처의 사람들과 역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미국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난을 겪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사탄이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 나라와 각 시대마다 그 타락성을 표현하며 하나님을 공격하는 독특한 방식이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패배케 했던 십자가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죽으셨다. 하지만 사흘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전혀 실패의 위기에 처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과 특히 목사들은 이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한다. 디데이(D-Day)가 있었다. 이제 뒤처리 시간이다. 우리 시대에 세속적인 의제가 지지를 얻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택하신 사람들 중 단 한 명이라도 구원얻는 데 실패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염려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논파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이 우리의 책이나 글에 설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초자연적인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또한 오늘 우리는 겸손과 확신과 기쁨으로, 그분의 말씀을 전해줄 수 있다.

편집자 주: 이 아티클은 원래 The Gospel Coalition에 게재된 것이다. Mark는 4월 13-15일에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서 열리는 The Gospel Coalition 2015 National Conference의 워크숍에서 이 주제를 다룰 것이다.

 

이 아티클은 개혁된실천사가 번역하여 제공한 것입니다. 유사한 자료를 위해 그들의 웹사이트를 방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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