멤버십 & 권징

교회 권징의 기본 지침

아티클
03.01.2010

선수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만 할 뿐 결코 훈련은 시키지 않는 코치가 있다면, 당신은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업시간에 설명은 하되 학생들이 틀린 내용을 결코 바로잡아주지는 않는 교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건강을 독려하는 말만 할 뿐 암을 고쳐주려고는 하지 않는 의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이들 모두가 일을 절반만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 트레이닝은 지시와 훈련을 요구한다. 가르침은 설명과 교정을 요구한다. 치료는 건강 독려와 질병 퇴치를 요구한다. 

가르치며 제자화를 행하지만 교회 권징은 실천하지 않는 교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것도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보기에 그런 것도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교회들이 다수 존재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들이 가르치며 제자화를 하지만 교회 권징을 실천하는 교회는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권징 없는 제자화가 종양을 무시하는 의사처럼 말이 안 되는 처사라는 점이다. 

권징 실천을 망설이는 교회들을 나는 이해한다. 권징은 여러 이유에서 힘든 문제이다. 하지만 권징 실천에 대한 이 같은 망설임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고 자애롭다고 믿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징계하시며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징계하신다(히 12:6).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잘 아는가?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를 징계하시는 것은 그들의 생명과 성장과 건강을 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10). 그렇다. 그것은 고통스럽지만 유익한 결실을 맺게 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의와 평강의 열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교회 권징은 궁극적으로 교회 성장으로 이끈다. 장미나무의 가지를 쳐주면 더 많은 장미가 달리는 것과 같다. 달리 말하자면, 교회 권징은 그리스도인의 제자화의 한 측면이다. ‘제자’와 ‘권징’에 해당하는 영어인 ‘disciple’과 ‘discipline’이 어원적 동족어임에 주목하라. 두 단어는 가르침과 교정을 수반하는 교육과 관련된 어근에서 유래했다. “형성적 권징”과 “교정적 권징”이라는 표현을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나의 목표는 교정적 교회 권징의 기초들을-“무엇을” “언제” “어떻게” 그리고 “왜” 권징하는지를-독자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교회 권징이란 무엇인가? 

교정적 교회 권징이란 무엇인가? 교회 권징은 회중과 그 멤버들의 삶에서 죄를 바로잡는 과정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권면의 말을 통해 죄를 바로잡음을 뜻할 수 있다. 또한 한 개인을 멤버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죄를 바로잡음을 뜻할 수도 있다. 교회 권징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행해질 수 있지만, 그 목표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을 교정하는 것이다. 

보복적인 것이 아니라, 치유적이며, 선지자적이며, 예고적이다 

죄를 바로잡는 것은 보복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행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보다는 치유적이고 선지자적이며 예고적인 행위이다.

치유적이라 함은, 그것이 그리스도인 개인과 회중으로 하여금 경건함에 있어(하나님을 닮아감에 있어) 자라도록 돕기 위한 것이란 뜻이다. 만일 교회의 한 멤버에 대한 험담이나 비방이 돌면, 다른 멤버가 험담자로 하여금 험담을 멈추고 사랑의 말을 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사람을 부당하게 해치는 데 사용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백성도 그리해야 한다. 

교회 권징이 선지자적이라 함은, 그것이 잘못이나 죄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비춤을 뜻한다. 그것은 개인이나 단체의 삶 속에 자리잡은 암을 드러내어, 그 암이 제거될 수 있게 한다. 죄는 위장의 달인이다. 예를 들어, 험담은 “경건한 관심”이라는 가면을 쓴다. 험담자는 자신의 말이 합리적이며 심지어 배려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 권징은 죄의 실체를 드러낸다. 그것은 죄를 지은 자와 그 죄에 결부된 모든 이들에게 죄를 드러내며, 그래서 그들 모두로 하여금 배우며 유익을 얻게 한다. 

교회 권징이 예고적이라 함은, 그것이 장래의 훨씬 더 큰 심판을 경고하는 것으로서(고전 5:5), 현재의 작은 심판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그러한 경고는 매우 은혜롭다. 교사가 학생을 낙심시킬까봐 두려워서 학기 내내 시험에 실패한 학생에게 합격 점수를 주면 그 학생은 결국 학기말 시험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은혜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권징은 죄에 붙들린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사랑으로 말하는 셈이다. “주의하세요. 만일 당신이 계속 이 길을 고집한다면 훨씬 더 큰 징벌을 당할 것입니다. 부디 지금 돌이키세요.” 

사람들이 권징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힘들다. 하지만 현재의 비교적 작은 징벌을 통해 장래의 큰 심판에 대해 경고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신가! 

성경신학적 근거들 

교회 권징의 이면에는 구속사의 원대한 계획들 중의 하나가 있다. 하나님의 타락한 백성을 회복시켜서 다시금 하나님을 반영할 수 있는 위치로, 자비롭고 생명을 공급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피조세계 전역으로 확장하는 그러한 고귀한 위치로 끌어올리려는 계획이다(창 1:26-28; 3:1-6).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반영해야 했다. 이스라엘 왕국도 그러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생각대로 통치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일에 실패했고,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성품을 열방에 반영하는 일에 실패하여 유배지로 흩어졌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로서, 우리의 행동은 본질적으로 그분에 대해 말한다. 이는 마치 거울이 앞에 있는 대상을 반영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타락한 인류가 굴곡진 거울들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타락한 인류는 거짓을 말하기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왔다. ‘하나님도 거짓말쟁이인 것이 틀림없어. 피조물이 그러하듯 창조주도 그러할 거야.’ 

하지만, 은혜롭게도, 아담의 한 아들, 이스라엘의 한 아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셨다. 그분을 가리켜 바울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묘사한다(골 1:15). 이제 이 한 아들에 연합된 자들은 동일한 “형상”을 입도록 부르심 받았다.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이 일은 교회의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고후 3:18; 롬 8:29; 고전 15:49; 골 3:9-10 참조). 

지역 교회들은 민족들이 그곳에 가면 참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점점 더 반영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세상이 지역 교회들의 거룩과 사랑과 연합을 볼 때,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잘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릴 것이다(마 5:14-16; 요 13:34-35; 벧전 2:12). 그렇다면, 교회 권징은 교회의 구성원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그분의 거룩이나 사랑이나 연합을 나타내지 못할 때 교회가 보이는 반응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삶 속에서 생기는 거짓된 형상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며, 거울에서 더러운 얼룩을 닦아내는 것과 같다. 

구체적인 본문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16-19절과 18장 15-20절에서 지역 회중에게 권징 권한을 주신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처음 언급된 땅에서 매고 푸는 열쇠의 힘은 마태복음 18장 15-20절에서 지역 회중에게 넘겨진다. 

바울은 교회 권징 과정을 여러 곳에서 묘사한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5장, 고린도후서 2장 6절, 갈라디아서 6장 1절, 에베소서 5장 11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 데살로니가후서 3장 6-15절, 디모데전서 5장 19-20절, 디모데후서 3장 5절, 디도서 3장 9-11절 등이다.

요한은 요한이서 10절에서 일종의 권징을 언급한다. 유다는 유다서 22절과 23절에서 권징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이 외에도 더 많은 예들이 있다. 함께하는 삶 가운데서 죄를 바로잡을 것을 예수님과 성경 기자들이 당부할 때마다 사실상 교회 권징을 염두에 둔 것이다. 

교회는 권징을 언제 행해야 하는가? 

교회는 권징을 언제 행해야 하는가? 누군가가 죄를 지을 때라는 것이 짤막한 대답이다. 하지만 사적인 상황과 교회 차원의 공적인 상황을 구분한 제이 아담스(Jay Adams)의 구분을 사용해서 말하자면, 비공식적인 권징인가 아니면 공식적인 권징인가에 따라 대답이 다를 수 있다. 

심각한 것이든 심각하지 않은 것이든, 모든 죄는 믿음의 형제자매들 간에 사적인 질책을 유발할 수 있다. 이는 동료 교회 멤버가 범하는 모든 죄를 우리가 질책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죄를(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적인 측면에서 신중하게 서로 질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또는 교회 차원의 교정적 권징을 요하는 죄들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성경적인 목록 

공식적인 권징을 행하는 것이 적절한 때에 대한 목록을 제시하는 이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회중주의 목사인 존 에인절 제임스(John Angell James)는 다섯 가지 범죄들을 권징해야 한다고 말했다. (1) 소문이 나쁜 모든 악덕들과 부도덕들(고전 5:11-13); (2) 기독교 교리 부인(갈 1:8; 딤후 2:17-21; 딤전 6:35; 요이 10,11절); (3) 분열 조장(딛 3:10); (4) 궁핍에 처한 가까운 친족에게 쓸 것을 제공하지 않는 죄악(딤전 5:8); (5) 화해되지 않은 적대감(마 18:7). 

이런 성경적인 목록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여기 묘사된 죄악들 각각이 심각하며 또한 외적으로 표출되는 것임에 주목하라. 이들은 단순한 마음의 내적인 죄가 아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릴 수 있다. 이처럼 외적으로 표출됨으로써, 이들은 다른 양들과 세상이 기독교에 대해 오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목록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죄들을 놓치고 있다(예, 낙태). 또한 교회 권징에 대한 성경 본문은 어느 한 가지 특정 죄만을 언급할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5장은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죄에 대해 지적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 죄만을 권징할 것을 교회들에게 말하고 있지 않다. 교회가 이런 사례들에서 다른 죄들에 대한 적용을 이끌어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외적이고, 심각하고, 회개하지 않는 죄 

성경에 나오는 여러 사례들을 종합하여 보면, 외적이며, 심각하고, 회개하지 않는 죄에 대해 공식적인 교회 권징이 요구된다고 볼 수도 있다. 먼저 외적으로 드러나는 죄여야 한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죄이어야 한다. 어떤 교인의 마음속에 탐욕이나 교만이 들어 있다고 의심될 때마다 교회가 곧바로 그를 쫓아내려 해선 안 된다. 이는 마음의 죄가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주님은 알고 계시며, 또한 마음의 문제는 결국에는 겉으로 표출될 것이다(삼상 16:7; 마 7:17,18; 막 7:21). 

둘째, 심각한 죄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어떤 이야기를 과장하는 형제를 보고서 개인적으로 그를 만나서 그 문제를 지적할 수는 있지만, 설령 그가 자신의 죄를 부인하더라도 그를 회중 앞에 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 이야기를 부풀리는 죄와 같은 것은 우상숭배와 자기합리화 등 보이지 않는 훨씬 더 심각한 죄 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내가 그 사람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논의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죄들이다. 둘째로, 작은 죄까지 모조리 추적하다 보면 교회에 지나치게 의심하는 분위기가 돌게 되고 율법주의를 조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회중의 삶에는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의 여지가 요구되기 때문이다(벧전 4:8). 모든 죄를 철저히 추적해야 하는 건 아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끝으로, 공식적인 교회 권징은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가해지는 적절한 과정이다. 심각한 죄에 결부된 사람이 성경에 수록된 하나님의 명령에 개인적으로 직면해 왔지만, 그 죄를 버리기를 거부한다. 그는 예수님보다 죄를 더 소중히 여긴다. 

내가 교정적인 교회 권징을 처음 경험했을 때 이들 세 가지 요소 모두가 결부되어 있었다. 문제된 교인은 나의 좋은 친구이자 동역자였던 사람이다. 나와 교회는 그가 성적인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적어도 어느 날 점심식사 자리에서 그가 내게 그 사실을 말하기 전까지는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의 말을 듣고서, 나는 곧바로 그런 행위에 대해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회개를 촉구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리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 모두에게 같은 말을 했다: “하나님은 내게 괜찮다고 하셔요.” 여러 달에 걸쳐 이런 대화를 나눈 후에, 교회는 공식적으로 그를 친교에서 제외시켰다. 그의 죄는 심각했고, 회개되지 않았으며, 분명하게 외적으로 표출되었다. 그 죄는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에 대해 교회 안팎의 사람들을 오도할 수 있었다. 교회는 여러 달에 걸쳐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그를 사랑했다. 우리는 그가 죄에서 돌이켜 이 세상이 주는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돌이킬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는 단호했다. 죄와 하나님 말씀 중에서 죄를 선택했다. 그래서 교회는 공식적 조치를 단행했다. 

교회가 권징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 

교회가 권징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서 기본적인 개요를 제시하신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형제에 대한 일대일 권고로 제반 과정이 시작된다는 것에 주목하라. 그리고 화해를 낳기 위해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과정을 확장해선 안 된다는 것에 주목하라. 예수님은 그 과정을 네 단계로 묘사하신다. 

기본적인 네 단계 

1. 만일 두 사람 간의 죄 문제가 그들 선에서 해결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마무리된다.

2. 만일 그렇게 해결되지 않으면, 피해를 입은 형제가 두세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해야 한다(마 18:16). 예수님은 이 문구를 신명기 19장에서 취하셨다. 그곳의 문맥은 거짓 고소로부터 보호하는 내용이다. 신명기는 어떤 범죄의 혐의가 있을 때마다 “철저한 조사”를 당부한다(신 19:18). 예수님도 그리스도인들이 진실과 공의에 충실하고자 부지런히 노력해야 함을 가르치신다. 이들 두세 증인은 심각하고 외부로 표출된 범죄가 있음을 그리고 범죄자가 회개하지 않음을 확증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개입시킴으로써 대상자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하거나 혹은 대상자가 아무 문제 없음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 단계와 앞 단계 모두 적절한 횟수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3. 만일 두세 사람이 개입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피해자는 교회에 이를 알려야 한다(마 18:17a). 우리 교회에서 이 일은 전형적으로 장로들에게 맡겨진다. 주께서 교회의 모든 일들을 감독하게 하기 위해 장로들을 주셨기 때문이다(딤전 5:17; 히 13:17; 벧전 5:2). 장로들은 외적으로 표출된 심각한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 고집하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공적으로 공개한다. 또한 그 죄가 무슨 죄인지를 간략히 묘사한다. 이때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하거나 범죄자의 가족을 당황케 하지 않을 정도로 묘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장로들은 회중더러 두 달 동안 범죄자와 접촉하면서 회개를 촉구할 것을 권고한다.

4. 교회 권징의 마지막 단계는 친교나 교회 멤버십에서 배제시키는 것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성찬(또는 주의 만찬)에서 배제함을 뜻한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b). 그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밖에 있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언약 식사를 함께 해선 안 될 사람으로 간주된다(아마도 교회의 다른 모임들에는 계속 참석하도록 독려 받겠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두 달의 기간이 끝나고 범죄자가 죄에서 벗어나길 거부하면 이 단계를 취한다. 물론 두 달은 임의의 기간이다. 이는 우리 교회의 정규적인 교인 총회의 일정을 고려한 기본적인 일정을 제시한 것이다. 상황에 따라, 교회는 이 일정을 더 당기거나 늦출 수 있다.

왜 권징 과정의 속도를 늦추거나 높이는가? 

때로는 권징 과정을 매우 느린 속도로 진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죄인이 자신의 죄에 맞서는 일에 최소한 어느 정도의 관심을 보이는 경우 그렇게 한다. 고려될 필요가 있는 것은 죄의 성격만이 아니라 죄인 자신의 성격이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다양한 죄인들에게 다양한 전략들이 적용된다. 바울이 권하듯이,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아야 한다(살전 5:14). 때로는 어떤 사람이 게으르거나 자신의 죄에 무관심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연약한 것인지를 곧바로 명확히 구분하기 힘들다. 

중독에 빠져 있던 한 형제가 기억난다. 한 동안 나는 그가 자신의 도덕적 타락을 변명만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여러 해에 걸친 범죄로 그의 영혼이 정말 약해지고 병들어서 죄를 멈추기 힘들어진 상태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종류의 물음들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에 따라 권징 과정의 속도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때로는 권징 과정의 속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이는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묘사하신 단계들 중에서 한두 개를 생략함을 뜻할 수 있다. 그 속도를 분명히 높여도 좋을 두 경우로는, (1) 교회 분열과 (2) 공개적인 추문(즉, 교회 밖의 지역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곡해하게 할 만한 죄)이다. 첫 부류에 대해, 바울은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말한다(딛 3:10). 여기서 바울이 어떤 과정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말은 교회가 전체 몸을 위하여 분열 조성자들에 대해 신속하고 단호하게 반응해야 함을 시사한다. 

훨씬 더 빠른 과정이 고린도전서 5장에 제시된다. 거기서 바울은 공개적인 추문을 일으킨 사람을 곧바로 내쫓으라고 당부한다. 그 죄는 교회 밖의 사람들마저 비난하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회개할 수 있도록 그 사람을 경고하라는 지시마저 하지 않는다. 단지 “사탄에게” 내어 주라고 말한다(5절). 

회개 촉구 과정을 생략하여 그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바울이 회개나 두 번째 기회에 무관심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가 그 사람과 단절하도록 지시한 것은 그의 영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5b).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마침내 교회에 다시 합류할 길을 바울이 열어놓은 것이 분명하다(고후 2:5-8 참고). 하지만 그의 죄가 공개적으로 알려져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 앞에서 동일하게 공적인 선언으로 대응해야 한다.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5장에 따르면 그 사람이 죄에 결부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범죄 여부에 대해 의문이 있을 경우에는, 설령 그것이 추문을 야기한 죄일지라도, 예수님이 마태복음 18장에서 요구하시듯이 교회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철저한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예컨대, 교회는 소문에 근거하여 어떤 교인을 횡령죄(공개적 추문을 야기하는 죄임)로 권징하길 원치 않는다. 3개월 후에 세속 법정에서 증거불충분으로 기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로 하여금 권징 속도를 높이게 할 수 있는 두 가지 고려사항들은 무엇인가? (ⅰ) 교회의 연합에 즉각적인 위협이 되는 경우와, (ⅱ) 지역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에 큰 해를 입힐 수 있는 경우이다. 어느 것이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지를 정확히 규정해주는 공식은 없으며, 교회는 이처럼 힘든 문제들을 처리할 경건한 장로들을 지정해둘 필요가 있다. 

출석과 회복 

교회 멤버들은 멤버십과 성찬(또는 주의 만찬)에서 배제된 사람과 주중에 어떻게 교류해야 하는지에 궁금해 한다. 또한 그 사람이 교회의 매주 모임들에 계속 출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한다. 신약성경은 이 문제를 여러 곳에서 다룬다(고전 5:9,11; 살후 3:6,14-15; 딤후 3:5; 딛 3:10; 요이 10절).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우리 교회의 장로들이 마련한 지침들은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된다.

  • 회개하지 않은 자가 회중에게 물리적인 위협이 되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교회는 매주 모임에 그 사람을 환영해야 한다. 그 사람으로서는 회중석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 권징을 받은 사람의 가족인 멤버들은 가족으로서의 성경적인 의무를 계속 행해야 하지만(예, 엡 6:1-3; 딤전 5:8; 벧전 3:1-2), 교회 멤버들이 그 사람과 교제하는 방식은 현저히 달라져야 한다. 별생각 없이 만나거나 친교를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만나야 한다. 

교회 친교로의 회복은 참된 회개의 표지가 있을 때 이루어진다. 참된 회개가 어떤 것인지는 범한 죄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때로 회개는 흑백의 문제이다. 아내를 버린 사람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에게 있어 회개는 아내에게 돌아감을 뜻한다. 분명하고 단순하다. 하지만 때로는 회개가 죄를 완전히 제압하는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열심으로 그 죄에 대항함을 뜻한다. 중독에 빠진 사람의 경우가 그러하다. 

분명히, 참된 회개를 판가름하는 문제는 많은 지혜를 요하는 힘든 일이다. 신중함과 동정심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회개의 결실이 나타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경과되어서는 안 된다(고후 2:5-8 참고). 일단 교회가 회개하는 사람을 친교와 성찬(또는 주의 만찬) 참석으로 회복시킬 것을 결정하면, 근신 기간이니 2등 멤버니 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는 용서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요 20:23) 회개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확언하며(고후 2:8) 또한 축하해주어야 한다(눅 15:24). 

왜 교회가 권징을 행해야 하는가? 

교회가 권징을 행하려 할 때, 종종 실제 삶의 복잡한 상황에 직면한다. 여러 가지 상황들을 꼼꼼히 살펴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정확한 사례를 성경에서 찾기도 힘들다. 공식적인 교회 권징이 요구되는지, 그 과정이 얼마나 오래 걸려야 하는지, 혹은 범죄자가 진정으로 회개하는지가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다.

회중과 리더들이 이 복잡한 문제를 처리해나갈 때, 그들은 교회가 다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이름과 영광을 지키기 위해 부르심 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교회 권징은 그리스도의 명성에 대한 것이며, 그리스도를 터무니없이 대변하는 사람의 신앙고백을 교회가 계속 인정해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것이다. 죄와 죄의 상황들은 엄청나게 다양하지만, 교회는 언제나 한 가지 물음을 맨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죄인의 죄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을 반영할 것인가?” 

결국, 그리스도의 명성에 마음을 쓰는 것은 비그리스도인들의 유익에 마음을 쓰는 것이다. 교회가 권징을 행하지 않을 때 교회는 세상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 교회는 짠 맛을 잃은 소금과 같아서, 짓밟힐 뿐이다(마 5:13).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세상에게 아무런 증언도 하지 못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명성에 마음을 쓰는 것은 교회의 다른 멤버들에 마음을 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처럼 보이길 원해야 하며, 교회 권징은 교회의 거룩한 모습을 분명히 지키도록 도와준다. 공식적인 권징이 행해질 때마다, 멤버들은 자신의 삶을 더 철저히 돌아보게 된다. 회중주의자인 제임스는 이 점을 잘 요약한다. “권징의 유익은 명백하다. 그것은 타락자들을 바로잡고, 위선자들을 알아내고, 교회에 건전한 외경심이 두루 퍼지게 하고, 신중함과 기도를 더하게 하고,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사실과 그 결과를 입증하며, 무엇보다도 불의에 대항하는 공적인 증언을 제공한다.”

끝으로, 그리스도의 명성에 마음을 쓰는 것은 죄에 붙들린 사람에 마음을 쓰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바울은 죄를 범한 사람을 회중에서 배제시키는 것이 주 예수의 날에 그의 영이 구원받게 하기 위한 가장 자애로운 배려임을 밝혔다(고전 5:5). 

왜 교회가 권징을 행해야 하는가? 권징 대상인 개인의 유익과 비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이 기본적인 목표들을 마음에 간직하면 교회와 장로들이 어려운 과정들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여기 크게 역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  John Angell James, Church Fellowship or The Church Member’s Guide, Works of John Angell James 제10판 11권 p.53에서 발췌함.
  2.  James, Christian Fellowship, p.53
  3.  Mark Dever, Nine Marks of a Healthy Church(Crossway, 2004), p.174-78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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