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신학

오늘날 많은 설교의 문제점-그리고 치유책으로서의 성경신학

Article
03.01.2010
  • 진단-오늘날 많은 설교의 문제점(1부)
  • 발견-성경신학이란 무엇인가(2부)
  • 지침-설교할 때 성경신학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3부)

진단-오늘날 많은 설교의 문제점(1부) 

내가 속한 교회연합(남침례회) 안에서 성경의 무오성을 위한 전투는 승리를 거두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정도 승리로 너무 빨리 자축해선 안 된다. 또한 유사한 싸움에서 승리한 다른 복음주의 교단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보수적인 교회들이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실천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의 충분성을 여전히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설교단에서 진지하게 선언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 교회 안에 사실상 하나님 말씀의 기근이 있다. 설교 시리즈의 제목이 길리건스 아일랜드, 보난자, 매리 타일러 무어 등의 TV 예능 프로그램 제목을 연상시킨다. 종종 설교는 성공적인 결혼 방법이나 우리 문화 안에서의 자녀양육법에 초점을 맞춘다. 가족 문제들에 대한 설교는 물론 적절하며 필요하지만, 관련하여 종종 두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첫째, 그런 주제들에 대해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것이 종종 무시된다. 결혼에 관한 설교들 중 얼마나 많은 설교들이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대해 바울이 실제로 말한 내용을(엡 5:22-23) 신실하고 간곡하게 제시하는가?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 대해 난처해하지는 않는가? 

둘째, 그런 설교들이 거의 항상 수평적인 차원에 그친다. 아마 이것이 더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회중은 매주 이 같은 설교에서 언급된 일들을 주요 과제로 여긴다. 하나님의 말씀을 관통하고 모든 삶의 기초를 제시하는 신학적 세계관은 회피된다. 목사들은 매주 행복한 삶을 사는 법을 조언하는 디어 애비(Dear Abby)와 같은 도덕주의자로 변질된다. 

그런 설교가 추천하는 도덕적인 삶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성경과 일치하기 때문에 많은 회중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신자들과 불신자들 모두의 느낀 욕구(felt needs)에 호소한다. 

또한 목사들은 그들이 말한 도덕적인 요점이 현실 상황하에서 구체화될 수 있도록 자신의 설교를 이야기와 예화들로 채워야 한다고 믿는다. 모든 좋은 설교자는 예화를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설교가 이야기들로 가득 차서 아무런 신학도 담고 있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가르치는 것에 대해 회중들이 불평하지 않기 때문에 복음주의 교회들이 신학적으로 잘하고 있다고 말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있다. 그런 견해는 매우 두려운 일이다. 목사로서 우리는 “전체적인 하나님의 뜻(whole counsel of God)”(행 20:27)을 선포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소명을 실현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회중의 투표로 결정할 순 없다. 우리는 성경의 요구에 의존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배우지 못한 회중은 목사들이 어떤 점에서 실패하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바울은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을 경고한다(행 20:29). 다른 곳에서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라고 말한다(딤후 4:3-4). 만일 우리의 설교를 회중이 바라는 것에 따라 평가한다면, 우리는 이단을 위한 레시피대로 요리하게 될 수 있다. 이 말은 회중이 이단이라는 뜻이 아니라, 대중의 견해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함의 시금석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목사의 소명은 회중이 듣고 싶어하는 것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떼를 먹이는 것이다. 

회중이 설교자들을 통해 받는 훈련이 빈약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우리가 계속해서 도덕주의적인 설교를 회중에게 먹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친절하고 용서하고 자애로우며 선한 남편이나 아내가 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이것은 좋은 일이다!). 그들의 마음이 따뜻해지고 심지어 교화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적 기초가 무시되면, 이단이라는 이리가 살금살금 다가온다. 목사 자신이 이단적이어서가 아니다. 그의 신학은 온전히 정통적이며 신실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설교에서 신학을 당연시하고서, 성경의 줄거리와 신학을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일을 게을리한다. 

따라서 다음 세대나 그 다음 세대에서는 회중이 무심코 부지불식중에 더 자유주의적인 목사를 초빙할 수 있다. 이렇게 초빙된 목사 역시 선하고 친절하며 자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설교를 할 것이다. 또한 그는 올바른 결혼생활과 역동적인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할 것이다. 회중은 그 차이점을 분간조차 못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임 목사의 신학이 보수적인 이전 목사의 그것과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전 목사가 자신의 신학을 선언하거나 설교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보수적인 목사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었지만 그 충분성은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이 그의 회중에게 가르치는 모든 것을 회중에게 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신학에 대한 우리의 무지가 부단히 수면 위로 부상한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설교자가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도록 초청하는 광경을 두 차례 보았다. 한번은 큰 스타디움에서였는데 그 설교자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경기장에서의 설교는 복음 전도를 위한 것이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복음은 전혀 선포되지 않았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리고 그분이 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왜 행위 대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수천 명이 앞으로 나갔고, 그들은 구원받은 사람들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최소한 일부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회심하기를 기도했는데,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아마 그들이 복음의 내용을 다른 데서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방문했던 어떤 교회의 예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설교자가 사람들더러 “앞으로 나와서” “구원받을” 것을 재촉하며 초청했지만, 그는 복음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런 설교가 우리 교회들을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로 채울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이중적으로 위험하다. 설교자를 통해 그들은 자신이 회심했고 결코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보장의 말을 듣지만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상태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그들은 이 포스트모던 시대를 위한 새로운 복음에 대한 설교, 즉 ‘좋은 사람이 되라’는 설교를 매주 듣는다. 

 

발견-성경신학이란 무엇인가?(2부) 

1부에서 묘사한 얄팍한 설교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정말 단순하다. 목사가 자신의 설교에서 성경신학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법을 배우려면, ‘성경신학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성경신학 대 조직신학 

조직신학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신학은 성경의 줄거리에 초점을 맞춘다. 조직신학은 성경신학을 통해 정보를 얻지만 무시간적이다. 돈 카슨에 따르면,

성경신학은 조직신학보다 더 성경 본문에 밀착되어 있으며, 다양한 성경 본문들 각각의 독특성을 민감하게 다루며, 다양한 본문들을 그 범주에 따라 연결시키려 한다. 따라서, 성경신학은 주해와 조직신학 사이에 놓인 다리와 같은 것이다(그리고 이들 둘은 불가피하게 서로 영향을 미친다). 

달리 말해서, 성경신학은 의식적으로 성경 본문의 메시지에 더 초점을 맞춘다. 성경신학은 성경 기자들에게 역사적 문맥에서 핵심적이었던 주제가 무엇인지를 물으며, 그 주제들의 통일성을 찾아내려 한다. 또한 성경신학은 성경의 줄거리에(구속사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전개되는 과정) 초점을 맞춘다. 3부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우리가 각 본문을 성경의 전체 줄거리와 연관되는 문맥 안에서 해석하고 설교해야 함을 뜻한다. 

한편, 조직신학은 특정한 물음이나 철학적 관심을 반영하는 물음을 본문에 대해 제기한다. 조직신학자들도 성경 본문 속에 담긴 테마들을 탐구할 수 있지만 해당 본문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모든 조직신학이 성경신학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브라이언 로스너가 말하듯이, 성경신학의 특징적인 강조점은 “성경 본문으로 하여금 논제를 정하게 하는” 것이다. 케빈 밴후저는 성경신학의 독특한 역할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힌다. “성경신학은 사람들의 다양한 역사적, 문학적 표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됨을 가정하고서 성경에 접근하는 해석법을 가리킨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신학은 성경 본문 자체를 중요시한다.” 

카슨은 성경신학의 긍정적인 기여를 이렇게 표현한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성경신학은 그 명칭이 암시하듯이 성경의 다양한 본문들을 귀납적으로 활용하면서도 모든 성경 본문들의 통일성을 드러내어 설명하고자 하며, 그 본문들의 범주에 주로 의존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정경적 성경신학, 또는 ‘전체 성경’ 성경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신학이 창세기나 모세오경이나 마태복음이나 로마서 또는 바울 서신들 전체에 한정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성경신학이 성경 전체를 포함하여, 그 속에 전체로서의 성경 줄거리가 통합될 수도 있다. 강해설교자들이 구속사의 줄거리를 고려하지 않고 레위기, 마태복음, 또는 계시록 등 특정 책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들은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격리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선언하지 않고 단편적인 방식으로 설교한다. 게르하르트 하셀은 우리가 “성경 본문들이 증언하는 실체의 모든 차원들에 공정하려는” 방식으로 성경신학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신학을 하는 것은 단지 신학교 교수들의 일이 아니라 모든 말씀 설교자들의 책임이다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차이점에 대해 카슨이 잘 설명했다. 조직신학은 역사신학을 활용한다.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화하기 위해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칼빈, 에드워즈 등의 많은 사람들의 글을 참조한다. 조직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문화적 배경과 우리 시대에 곧바로 적용하려 한다. 따라서 좋은 설교자라면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심오하고 강력한 말씀을 전하기 위해 체계화된 메시지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성경신학은 보다 귀납적이며 기초적이다. 카슨이 올바로 설명하듯이, 성경신학은 “중재하는 학문”인 반면에, 조직신학은 “결론짓는 학문”이다. 달리 말해서, 성경신학은 역사적이며 문학적인 성경 연구와 교의 신학 사이에서 연결 다리 역할을 한다. 

성경신학은 역사적 문맥 안에 놓인 성경 본문을 기초로 연구를 수행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신학이 순전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작업이라는 말은 아니다. 크리스터 스텐달이 주장하듯, 기록될 당시의 성경 본문의 의미와 현재의 의미를 깔끔하게 분리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다. 스코비는 성경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 신앙 헌신에 근거하여, 그 전제는 성경이 신적 계시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 수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기준을 형성하며, 신구약 성경 속의 모든 다양한 자료들이 전체 성경에 제시된 한 분 하나님의 계획 및 목적과 연결될 수 있다는 신념을 포함한다. 이러한 성경신학은 성경이 의미했던 것과 성경이 의미하는 것 그 중간 어느 지점에 서 있다.

따라서 성경신학은 신약 성경이나 구약 성경 중 어느 한쪽에만 한정되지 않고, 신구약 성경을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다. 사실, 성경신학은 성경이 그 자체의 규준으로 작용하며 따라서 성경 말씀의 신학을 풀어내는 데 신구약 성경 모두 필요하다는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균형 

성경신학을 함에 있어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사이에 근사한 변증법이 성립한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에서 시작된 구속사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성경신학은 내러티브(narative) 신학이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포착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의 역사적 전개는 구원 역사 또는 구속사로 지칭될 수 있다. 

성경의 책들을 약속과 성취의 관점에서 고려하는 것도 유익하다. 구약 성경에서 약속된 것이 신약 성경에서 성취된다. 우리는 구약 성경 계시의 역사적 세부 내용을 무시함으로써 그 계시를 탄생시킨 역사적 문맥을 삭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구약 성경으로부터 신약 성경으로의 계시의 진전을 인식해야 한다. 그럴 때 구약 성경의 예비적인 성격과 신약 성경의 최종적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구약 성경이 예비적이라고 해서 그 중요한 역할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약 성경의 의미를 파악할 때에만 신약 성경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모형론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런 접근법은 성경신학에 기본적이다. 왜냐하면 성경 기자들 자신이 그 방식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모형론이란 무엇인가? 모형론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사건, 인물, 제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고 하는 이론이다.⁹⁾ 예컨대, 마태는 마리아와 요셉과 예수님이 애굽으로부터 돌아온 것을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연관시켰다(마 2:15; 출 4:22,23; 호 11:1). 물론, “하나님이 의도하신 이 같은 상응 관계”를 신약 성경의 기자들만 본 것은 아니다. 구약 성경 기자들도 그것을 보았다. 예를 들어, 이사야와 호세아는 첫 번째 출애굽의 패턴을 따르는 두 번째 출애굽을 예고한다. 같은 방식으로, 구약 성경은 첫 번째 다윗보다 훨씬 더 위대한 새로운 다윗을 기대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 성경 자체에서 모형론적 관계의 점증적 측면을 본다. 모형의 성취는 언제나 모형 그 자체보다 더 크다. 예수님은 새로운 다윗일 뿐만 아니라 더 큰 다윗이시다. 

모형론은 역사 속에서 신성한 패턴과 목적을 인식한다. 성경의 최종적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의 드라마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을 알고 계시며, 그래서 우리는 독자로서 구약 성경에서 최종적 성취의 윤곽을 볼 수 있다. 

 

지침-설교할 때 성경신학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3부) 

성경 말씀을 설교할 때, 해당 본문이 구속사적 시간표의 어느 곳에 위치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성이 있지만, 설교 시에 성경신학을 잘 활용하려면 두 가지 기본 단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두 가지란 뒤돌아보는 것과 전체를 보는 것이다. 

뒤돌아보기-앞선 신학 

월터 카이저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설교할 때 각 책의 앞선 신학을 고려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를 설교할 경우에, 그 앞의 문맥을 떠나서는 출애굽기의 메시지를 올바로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만유의 창조주이시고, 그분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고, 그래서 사람들이 전체 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해나가야 함을 배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신성한 임무에 복종하는 일에 실패했다. 창조 후에 타락이 따라왔고, 타락은 세상에 죽음과 불행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 최종적인 승리가 도래할 것을 약속하셨다(창 3:15).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전개될 것이고 전자가 이길 것이었다.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싸움을 보며, 뱀의 후손이 매우 강력함을 알게 된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고, 노아 가족만 남기까지 악인들이 의인들을 압도한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지어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다. 하나님은 가인을 심판하시고,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류를 홍수로 멸하시고, 바벨에서 인생들의 계획을 무너뜨리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시며,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된 승리가 그들의 후손을 통해 이뤄질 것을 보증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후손과 땅과 전 세계적인 축복을 주실 것이다. 창세기는 후손에 관한 약속에 특히 초점을 맞춘다. 달리 말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당대에 약속의 땅을 소유하지 못했고 전 세계에 복이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창세기는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주신 열두 아들에 대한 기사로 마감된다.

 그러면 창세기의 이 “앞선 신학”이 출애굽기 공부를 위해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가? 그것이 출애굽기 해석의 토대를 형성하는데, 그 이유는 급속도로 불어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되는 출애굽기의 서두에서 우리는 창세기에 수록된 많은 후손들에 대한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되고 있음을 곧바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창세기 3장을 돌아볼 때, 우리는 바로가 뱀의 후손이고 이스라엘은 여자의 후손임을 이해한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 아기들을 죽이려는 바로의 시도는 창세기에 예고된 두 후손들 간의 싸움의 연속선상에 있으며 뱀의 후손의 계략을 보여준다. 

출애굽기와 모세오경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약속도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임을 알 수 있다. 이제 땅에 대한 약속이 실현되기 시작한다. 더욱이, 이제 이스라엘은 어떤 면에서 새 땅에서 새 아담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아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공간에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만일 창세기의 앞선 메시지를 알지 못하고 출애굽기를 읽으면, 우리는 그 이야기의 의의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 본문을 문맥을 떠나서 읽게 되며, 자칫 독단적인 해석을 하면서 읽을 것이다. 

앞선 신학의 중요성은 성경 전반에 걸쳐 분명하며, 여기서 다른 몇몇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여호수아 인솔 하의 가나안 정복은 아브라함 언약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가나안 점유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로 이해된다.
  • 반면에, 선지서들을 비롯한 여러 책들에서 예언된 북 왕국의 멸망(B.C. 722), 남 왕국의 멸망(B.C. 586) 및 포로생활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7-28장에 기록된 언약의 저주들의 성취를 나타낸다. 만일 설교자들과 회중들이 모세 언약이라는 앞선 신학과 그 언약에서 예고된 저주를 모른다면, 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이 포로로 붙들려간 사건의 의미를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 새로운 다윗에 대한 약속은 영원히 지속될 왕조와 관련하여 예전에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을 반영한다.
  • 선지서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여호와의 날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 만일 우리가 구약 성경의 줄거리를 모른다면,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들에 대해 무지하다면, 공관복음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성을 거의 이해할 수 없다.
  • 메시아와 인자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의의는 모두 이전의 계시에 뿌리를 둔 것이다.
  • 누가가 서두에서 밝히듯이,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행하며 가르치기 시작하신 일에 계속 이어지는 내용이며, 따라서 구약 성경과 예수님의 사역, 죽으심, 부활에 비추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 서신서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위대한 구원 사역에 근거하며 구원의 메시지와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교회들에게 설명하며 적용한다.
  • 끝으로, 계시록은 이야기의 절정으로 이해된다. 계시록은 마지막 때의 일을 알려주기 위해 단지 끄트머리에 덧붙인 내용이 아니다. 구약 성경 내용에 대한 많은 언급들은 계시록이 구약 계시를 배경으로 함을 보여준다. 또한 계시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며 행하신 모든 일의 완성에 대한 기록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구속의 줄거리가 성경의 모든 책들에서 동일하게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아가, 욥기, 전도서, 잠언, 시편과 같은 지혜서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들의 경우에도 기자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할을 전제로 함은 물론이고 창세기에 수록된 창조와 타락에 대한 기본적인 진리를 전제로 한다. 시편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노래하는 부분에 기록되어 있듯이, 때로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할을 뚜렷이 언급한다. 물론 우리는 성경 책들의 다양성을 상기하며, 모든 책들이 동일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님을 인식한다. 

여기서 설교자들이 주지해야 할 사실은, 자신의 설교가 구속사의 더 큰 성경 이야기와 조화를 이루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중석에 앉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행해 오신 일에 대한 큰 그림을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성경의 각 부분이 그 그림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전체 성경을 두루 고려하는 설교 

우리 설교자들은 앞선 신학에만 초점을 맞춰선 안 된다. 성경 전체도 고려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성경의 증언도 고려해야 한다. 만일 앞선 신학만을 설교한다면,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정확히 전하지 못할 것이며,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주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하지도 못할 것이다. 

창세기의 앞장들을 설교할 때, 우리는 여자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이심도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피조물이 허망한 데 굴복한 상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변할 것임도(롬 8:18-25) 선언해야 한다. 옛 창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창조가 있음을 전해야 한다. 끝이 시작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원래 창조 때의 축복이 새 창조에서 훨씬 더 커질 것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성취의 빛 안에서 레위기를 설교하지 않는다면 무슨 내용을 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구약의 희생제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서 성취되었음을 선언해야 한다.

음식과 정결에 관한 규례들은 통전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그럴 때 우리는 그런 규례들을 따를 필요가 없음을 이해한다. 이 규례들은 더 큰 어떤 것을 가리킨다. 즉, 신자가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새로운 삶과 거룩함을 가리킨다(고전 5:6-8; 벧전 1:15-16). 

신약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듯이, 신자들은 모세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갈 3:15-4:7; 고후 3:7-18). 옛 언약은 구원 역사의 특정한 기간 동안에 효력을 발휘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것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체결하신 언약 아래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게 구속력을 발휘한 율법이 오늘날의 국가들을 위한 패러다임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은-오늘날의 신율주의자들(theonomists)은 그렇게 주장함-잘못이다. 설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차이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정국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정치적 실체를 나타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국가를 위한 헌법을 지닌 정치적 실체가 아니다. 교회는 모든 민족과 방언과 종족들로 구성된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이 같은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회중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를 들어, 여호수아서에 수록된 가나안 땅 정복에 대해 설교할 때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게는 언젠가 가나안 땅을 소유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져 있지 않다.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 땅에 대한 약속을 모형론적으로 이해하며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될 것임을 알게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호수아 당시에 주어진 안식에 대한 약속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최종적인 안식으로 의도된 것이 결코 아님을 설명한다(히 3:7-4:13). 바울은 아브라함을 위한 땅 약속이 가나안에 국한될 수 없고 온 세계를 포함하는 것임을 설명한다(롬 4:13).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신자로서 지상의 도성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도성, 곧 장래의 도성을 기다림을 발견한다(히 11:10,14-16; 13:14). 혹은 요한이 계시록 21-22장에서 제시하듯이, 우리는 천상의 예루살렘을 기다리는데, 이 천상의 예루살렘은 곧 새 창조에 속한 것이다. 달리 말해서, 여호수아서 본문을 설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에 속한 우리의 유업을 강조하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의 줄거리를 전하는 일에 실패하게 된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메시지의 한 모서리를 잘라낸 단면만을 전함으로써 어떻게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예”와 “아멘”이 되는지(고후 1:20) 보여주는 일에 실패하고 만다. 

만일 우리가 성경신학을 활용하여 성경을 통전적으로 설교하면, 우리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모두로부터 그리스도를 전할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단순한 비유적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나 신구약 성경을 억지로 연관시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성경신학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의 해석법을 따른다면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은 구약 성경 자체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글로바와 그의 친구가 그러했듯이(눅 24장), 성경해석법을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배웠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이들은 사도들의 성경해석법은 성령의 영감에 따른 것이므로 오늘날 이를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견해에는 결함이 있다. 왜냐하면 그런 견해는 사도들이 구약 성경의 성취로 이해한 내용이 그 구약 성경 본문의 실제 의미와 일치하지 않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신구약 성경의 연관성은 임의적이며, 사도들이(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늘날의 구약 성경 해석을 위한 모범을 보인 것이 아닌 셈이다.

반면에, 영감을 받은 사도들이 구약 성경을 지혜롭게 읽었다고 받아들이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에 비추어 구약 성경 전체를 읽을 수 있는 본보기를 지닌 셈이다. 구약 성경의 줄거리와 구조 전체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분 안에서 완성된다. 구약 성경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됨을 깨닫는다. 구약 희생제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본체를 드러내는 그림자들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같은 절기들은 유월절 희생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은사와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가리킨다.
  • 신자들은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옛 언약의 그림자들 중의 하나이며(골 2:16-17; 참조, 롬 14:5), 더 이상 신자들에게 구속력을 발휘하지 않는 시내산 언약에 속하기 때문이다(갈 3:15-4:7; 고후 3:4-18; 히 7:11-10:18). 안식일은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고 마지막 날에 천상의 안식에서 완성될 안식을 내다본다(히 3:12-4:11).
  • 성전은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내다보며, 할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시작되고 성령의 사역을 통해 보증되는 마음의 할례에서 완성된다.
  • 이스라엘의 왕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는 사람인 다윗은 왕권의 정점에 해당하는 인물이 아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더 크신 다윗인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약속을 자신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실행하신 메시아 왕이시다.

만일 우리가 전체 성경의 면에서 구약 성경을 설교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약 성경으로부터 도덕적 교훈을 끌어내는 데 그치거나 혹은 구약 성경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구약 성경의 많은 부분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음을 알고 있다. 예컨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셨듯이 우리를 정치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오늘날 이스라엘 땅은 정치적으로 폭발하기 쉬운 곳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기쁨이 이스라엘에서 사는 것과 직결된다고 믿지 않으며, 성전에 가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을 예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구약 성경을 성경신학에 비추어서 통전적으로 설교하지 않을 경우에, 우리의 설교에서 구약 성경이 간과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소중한 보화들을 놓칠 뿐만 아니라 성경 계시의 깊이와 다면적인 특성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구약 성경을 읽으셨던 것처럼 그것을 읽지 못하는 위치에 놓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됨을 보지 못한다. 

구약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구약 성경을 그 역사적, 문화적 문맥 속에서 읽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해석자들의 첫 번째 과제는 구약 성경을 그 자체의 내용으로 읽고 그것을 기록한 기자가 전하고자 한 뜻을 파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구약 성경의 각각의 책을 앞선 신학에 비추어 읽음으로써 성경의 줄거리를 파악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모든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음으로써, 구약 성경도 성경의 전체 이야기에-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이야기에-비추어 읽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성경신학을 함에 있어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설교함에 있어 항상 성경 전체의 관점을 고려해야 한다. 앞에서 뒤로 그리고 뒤에서 앞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이야기의 끝은 물론이고 이야기의 진전도 고려해야 한다. 

결론 

설교자로서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의 뜻 전체를 선언하는 것이다. 설교자로서 우리가 성경신학을 활용하지 못하면 우리의 소명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도덕적 교훈과 예화들을 제시함으로써 회중으로부터 찬사를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전체 성경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를 통해 성경의 줄거리를 더 잘 이해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회중을 신실하게 섬기고 있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신실한 교사와 설교자가 됨으로써 우리의 보살핌을 받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온전해져 가기를 기원한다.

 

  1. A. Carson, “Systematic and Biblical Theology,” New Dictionary of Biblical Theology(T. Desmond Alexander와 Brian S. Rosner 편저, Downers Gorve, InterVarsity, 2000), p. 94에 수록됨. 또 다른 정의는 찰스 H. H. 스코비에 의해 제시되었다: “성경신학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 포함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려는 체계적인 연구로 규정될 수 있다”(“The Challenge of Biblical Theology,” Tyndale Bulletin 42[1991]: 36).
  2. Brian S. Rosner, “Biblical Theology,” New Dictionary of Biblical Theology, p. 5에 수록됨.
  3. Kevin J. Vanhoozer, “Exegesis and Hermeneutics,” New Dictionary of Biblical Theology, p. 56에 수록됨.
  4. 위의 책, p. 56.
  5.  Carson, “Systematic and Biblical Theology,” p. 100.
  6.  Gerhard Hasel, “Biblical Theology: Then, Now, and Tomorrow,” Horizons of Biblical Theology 4(1982): 66.
  7.  다음 토론을 위해서는 Carson, “Systematic and Biblical Theology,” p.101-02를 보라.
  8.  Scobie, “The Challenge of Biblical Theology,” p. 50-51.
  9.  Walter Kaiser, Jr., Toward and Exegetical Theology: Biblical Exegesis for Preaching and Teaching(Grand Rapids: Baker, 1981), 134-40.
  10.  Richard N. Longenecker, Biblical Exegesis in the Apostolic Period(재판, Grand Rapids: Eerdmans, 1999).
  11.  For the importance of Christ-centeredness in our preaching, see Graeme Goldsworthy, Preaching the Whole Bible as Christian Scripture: The Application of Biblical Theology to Expository Preaching (Grand Rapids: Eerdmans, 2000);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A Contemporary Hermeneutical Method (Grand Rapids: Eerdmans, 1999); Edmund P. Clowney, Preaching Christ in All of Scripture (Wheaton: Crossway,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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