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전도 & 복음

선교사 파송을 멈추라: 수가 많다고 항상 더 좋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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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2015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마 9:37-38). 

이 성경구절들은 사역지로 들어갈 준비를 갖춘 많은 선교사들의 기도카드에 적혀 있다. 이 구절들은 만민을 제자로 삼는 일을 그리스도인의 임무로 인식하는 많은 교회들과 사람들의 마음에서 불타오른다. 

서글프게도 교회가 여러 세대 동안 이 민족들에게 무관심했다. 따라서 최근에 우리가 선교에 나태했던 것을 바로잡고, 지켜보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는 것은 칭송할 만하다(엡 3:10). 

열방-미전도 종족에 둘러싸인 10/40창 지역-가운데서 몇 년 동안 행한 나의 사역을 돌아보면서, 나는 위에서 말한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너무 과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추가 한쪽 방향으로 지나치게 넘어가서 다시 반대 방향으로 밀어야 할 상황으로 보인다. 

지상명령은 엄청난 것이며, 모든 엄청난 임무가 그렇듯이, 지상명령은 비전과 헌신과 많은 인적 자원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구 교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때가 많다. “그들을 보내는 일을 그만두라! 자격미달 선교사 파송을 중단하라!” 

분명 일꾼은 부족하고 추수할 것은 많다. 그러나 일꾼이 많을수록 반드시 더 좋은 건 아니다. 현 세대를 특징짓는 성급함이 “긴박함”을 구실로 선교운동 속에 파고들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 성급함을 억제하기보다는 종종 조장한다. 

그 결과는? 

솔직히, 적어도 아직은 가지 말아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열방으로 가고 있다. 

나는 더 많은 교회들이 다음 물음들을 고려하길 원한다: 귀 교회의 목사나 장로로는 결코 임명하지 않을 사람을 해외의 교회 개척 현장에 파송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해외 교회 개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는 주요 기준이 입증된 신실함보다는 “열정”인 듯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역 교회 일꾼을 위한 기준보다 최전선 일꾼을 위한 기준이 더 낮은 이유가 무엇인가? 

해외 사역의 어려움과 그 스트레스와 유혹들은 매우 실제적이다. 큰 열정은 품었지만 이해 부족인 상태로 이 어려움에 직면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혜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말했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잠 19:2, ESV에서 직역). 

이 잠언은 지식 없이 소원만으로 전개되는 선교 상황을 잘 요약해준다. 선교 사역에서 지식 없는 소원은 위험하며, 심지어 영적으로 치명적이다. 

추수를 위해 희어진 들이 수확물을 망치는 일꾼들로 채워지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도구를 오용하거나 남용하는 일꾼들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때로는 그릇된 목적으로 낫을 휘두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들을 상상해보라. 또한 그들이 낫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들의 손은 비어 있다. 이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많은 교회들과 파송 기관들이 밀과 잡초를 분별하는 법을 가르치는 데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분별력을 결여한 선교사들이 잡초를 단으로 묶어두고서 파종 성공에 대해 보고한다. 우리는 교회로서 임무를 받았고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받았지만, 평안의 복음을 선포하려고 내딛는 발걸음들이 지식 없이 소원만 지닌 까닭에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 

과연 일꾼들이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성급함은 실패를 자초한다. 교회들이 특정한 시간까지 특정한 수의 사람들을 파송하려는 주도적 목표를 설정할 때, 그 목표를 맞추려는 마음에서 제자화 과정을 실질적으로 건너뛸 수 있으며, 그 결과 현장에 투입되는 사람들이 해를 입고 그 현장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우리는 열정적인 인내의 사례로서 바울을 보아야 한다. 회심 순간부터, 그는 그의 인생에 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들었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그의 첫 번째 선교여행이 시작되기 전에 10여 년의 기간이 있었다. 그는 아라비아에서 3년의 준비 기간을 가졌고, 고향인 다소에서도 시간을 보낸 후에, 바나바와 함께 파송되기 전까지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했다. 회심 무렵에 이미 엄청난 성경 지식을 지녔던 바울이 그렇게 했다. 장로들과 회중을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안디옥 “모교회”에서 파송되기 전에는 바울이 선교를 시작하지 않은 것 같다. 

앞 세대의 선교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예전에는 성경 대학 이수가 자격 요건이었음을 알게 된다. 애도니럼 저드슨 같은 이들의 전기문을 읽어보면, 목사 안수가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교회가 허락만 한다면 몇 가지 평가 통과 후 2주 동안의 합숙훈련에 참가하고는 신속히 현장 투입을 허락받는다. 이처럼 편리하고 간소화된 시스템으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미전도 종족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수가 많다고 항상 더 좋은 것은 아니다. 

힘든 지역에 복음을 전하면서 마주치게 될 도전들은 성숙하고 검증된 성품을 요구할 것이다. 복음 전도 대상에게서 선교사들이 듣게 될 질문들은 종종 깊고 넓은 신학적 지식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위협적인 대적과 마주칠 경우에는 깊이 뿌리내린 신앙이 요구될 것이다. 

해외 선교에서 실용주의가 만연한 이유는, 사역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얘기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이단이 급격히 확산된다. 너무나 많은 선교사들이 영적으로 미성숙하며 실천적인 면에서 무책임하기 때문에 세상적인 삶이 만연하게 된다. 교회들이여,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모르며 또한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을 파송하는 일을 중단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일을 중단하라. 

소원은 칭찬할 만하지만, 소원은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요구되고 칭송되어야 하는 건 소명이다. 아무런 “소명”이 아니라, 진리에 뿌리내리고, 다른 사람들의(특히 그 사역자를 오래도록 잘 아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여러 해 동안의 결실을 동반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성경에 계시된 복음의 확실한 약속들을 주요 목표로 삼는 소명이다. 

지역 교회들은 선교 사역에 있어 긴 안목을 지녀야 하며 나아가 신실한 복음 사역을 인내로 감당할 수 있는 많은 제자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들은 질적인 면을 조금도 희생시키지 않고서 양적인 성과를 위해 일해야 한다. 

선교사들 가운데 사역중단율이 매우 높고, 교리적 모호함이 선교지에 만연하며, 또한 선교사들이 심각한 죄를 범하는 것이 너무나 흔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파송되지 말아야 하는 사람들이 파송되는 것은 교회들이 그들을 너무 서둘러서 보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열방으로 보낼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다른 사람들을 잘 가르칠 수 있도록 그들을 잘 가르치라. 그러한 역량을 확인하기 전에는 그들을 보내지 말라(딤후 2:2). 

2) 그들로 하여금 건전한 교리를 분명히 전하며 거짓 교리를 확실히 배격할 수 있게 하라. 반박에 답하거나 거짓을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의 결여는 타종교나 엉터리 선교사들과 마주칠 때 낭패를 불러온다(딛 1:9; 엡 4:14). 

3) 그들로 하여금 성경적인 권위에 확실히 복종할 수 있게 하라. 그들은 자신의 자율성에 대한 도전을 전혀 받아본 적이 없는 독불장군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파송되기 전에 자신의 책무에 기꺼이 복종하는 시간을 얼마 동안 가질 필요가 있다(히 13:17-18). 

4) 3항과 연관된 내용으로서, 그들은 경건한 성품을 입증받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상담 과정이나 성격 프로파일 작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긴 시간에 걸친 긴밀한 교류와 지속적인 제자화를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히 12:1). 

5) 당신의 교회에서 장로로 삼기를 꺼리는 사람이라면, 해외는 물론이고 어디든 교회를 개척할 곳으로 그를 보내지 말라. 만일 장로감이 아닌 사람을 파송하려 한다면, 신실한 목자들을 통해 그들의 영적 상태와 사역을 점검받을 수 있는 기존 교회가 있는 곳으로 그들을 보내는 것이 좋다(히 10:24-25). 

6) 파송되는 모든 개척 사역자들의 목표는 둘 중 하나이다. 기존 교회에 합류하거나 가능한 한 빨리 새 교회를 시작하기 위해 신자들을 모으는 것이다. 만일 기존 교회가 없다면, 개인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핵심 인원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혼자여선 안 된다. 교회론과 선교학은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교회가 교회를 개척한다. 파라처치(parachurch) 단체는 교회를 능가하려고 하기보다는 이 일을 하도록 교회를 돕는 전문적이며 소중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행 20:28; 16:13). 

7) 끝으로, 파송되는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고 준비를 갖추었다는 사실에 대한 교회 내의 의견 합치가 필요하다. 이 의견 합치가 파송되는 이들을 보호해주며 그들이 시들거나 변하기 쉬운 자신의 웅장한 뜻보다 더 큰 무엇의 일부임을 확인해줌으로써 엄청난 격려가 된다(행 13:3).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교회의 선교 의욕을 꺾으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지속적 신실함을 목표로 삼는 장기적 전망을 독려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달리는 것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경건한 긴박성은 주의 깊은 목회 준비를 포함한다. 만일 파송의 주요 목표가 항상 증가하는 회심자 수라면 이 진리가 불분명해진다. 파송의 주요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 우리가 준비하고 또 준비되어야 하는 것은 이를 위해서이다. 

따라서 긴박성을 느끼되, 긴박성 때문에 지혜를 희생하지는 말자. 하나님의 영광이 여기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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