멤버십 & 권징

회중주의는 오후 8시에 멈추지 않는다

아티클
08.26.2015

회중주의자들은 지역 회중들의 멤버십과 권징과 교리에 대해 지역 회중들이 궁극적 책임을 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이 무슨 뜻일까? 회중이 교회 생활의 일부를 책임지고 장로들이 나머지를 처리한다는 뜻일까? 우리가 교인 총회에서 성경적으로 충분한 정보를 취득한 후 투표하기만 하면 회중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일까? 아니면 “멤버십과 권징과 교리”는 단순히 “네”와 “아니오”를 말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교인 총회는 회중주의가 작동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사람들을 멤버로 받아들이거나 멤버십에서 배제하는 일과 관련하여 전체 교회가 책임을 행사한다. 하지만 교회 생활 전체에 있어, 그처럼 드물게 개최되는 회의가 큰 의미를 지닐 순 없는 것 같아 보일 수 있다. 회중이 기도와 예배를 위해 모일 때,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모임이 없는 나머지 약 300일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그때에는 회중주의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새 멤버들을 받아들이거나 어떤 멤버들을 권징하기 위해 1년에 12회 투표하는 것 외에는, 회중주의 교회들도 기본적으로 장로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의 목적은 장로들의 권위와 회중의 최종적 권위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 탐구는 바비 제이미슨(Bobby Jamieson)이 다른 데서 행한 바 있다. 장로들은 교회에 주어진 소중한 선물이며, 우리는 그들의 권위에 적합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이 아티클의 요점은, 회중이 교회의 멤버십과 권징과 교리에 대해 지상에서의 궁극적 책임을 갖는다고 말할 때, 그 말은 그저 회중이 교회 생활의 일부분에 대해 권위를 갖고 나머지는 장로들이 처리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에 멤버십과 권징과 교리에 대한 회중의 책임은 교회의 전체 삶에 대한 책임이다. 

회중주의는 교인 총회 때 작동하다가 회의가 파하면 활동을 멈추는 임시적인 정치형태가 아니다. 교회의 멤버십과 권징과 교리에 대한 회중의 감독(oversight)은 항시 이루어져야 한다. 항시 회중은 장로들이 교회를 인도하는 형태를 빚고 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회중주의는 회중들로 하여금 서로를 보살피며 양육하게 해야 한다. 회중교회 정치의 큰 유익들 중 하나는, 회중으로 하여금 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단지 그들 자신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통해 그들이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점을 강력히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회중주의는 전체 회중이 교회의 삶 전체를 항시 감독함을 뜻한다. 

멤버십과 권징 

문제의 일부는, 멤버십과 권징과 교리를 단속하는 것이 교회의 전체 질서와 삶에 결부된 일이 아니라 교회 생활 중의 특정 사건들에만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덫에 빠지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만일 “멤버십과 권징과 교리”에 대한 최종적 권위를 단지 누군가를 멤버로 받아들이고 누군가를 배제시키는 것 또는 믿음의 진술을 확인해주는 “투표”에 관한 것으로 이해한다면(서구 교회의 상황임), 당신은 회중교회 정치가 단지 가끔 벌어지는 몇몇 일들에만 기여할 뿐이라는 느낌을 갖기 쉽다. 

그러나 만일 한 회중이 어떤 사람을 멤버로 받아들이면, 그 회중은 교인 총회가 끝난 이후에도 오래도록 그 받아들인 멤버를 감독하고 격려하고 잘못을 교정해줄 책임이 있다. 회중은 그 사람의 신실성을 매일 보살피는 것을 그들의 청지기직의 일부로 삼는다. 매고 푸는 권한은 어떤 사람을 교회에 받아들이거나 교회를 떠나게 하는 한 번의 행사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해서, 한 멤버를 받아들이고자 투표하는 것은 차기에 공직을 담당할 사람을 뽑기 위해 투표하는 것과 유사하기보다는 오히려 결혼과 유사하다. 결혼은 결혼식 행사를 포함하지만, 이 행사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를 향해 매일 헌신하고 책임을 지는 일의 시작을 알린다. 회중이 어떤 사람을 멤버로 받아들일 때, 그 회중은 일주일 내내 그리고 공적 모임에서 그 멤버를 만나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그를 제자화할 임무를 맡게 된다. 회중이 어떤 사람을 멤버십에서 배제시킬 때, 그 회중은 날마다 그 사람을 세리처럼 여기며 회개를 촉구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멤버십이나 권징과 관련한 회중의 권위는 단지 한 번의 행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매일의 책임을 위한 것이다. 

교리 

교리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교회의 교리와 관련한 회중의 권한은 단지 교회의 신앙 선언문을 확언하는 한 번의 투표나 거짓 교사를 권징하는 일을 통해서만 표현되는가? 그것도 분명 그 권위의 일부이다. 하지만 교회의 교리를 감독하는 회중의 역할은 단지 한 사건에 국한될 수 없다. 

예를 들어, 회중은 신실한 가르침을 확언하고 기대하며 지원할 책임이 있으며, 그런 일을 잘하는 이들에게 갑절의 경의를 표할 책임이 있다(딤전 5:17). 덧붙여 말하자면, 회중은 교회의 신학적 협약(theological commitments)을 지속하고 적용하고 살아내고 또한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대개 설교하는 목사들만이 공공 모임에서 신학적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매주의 설교에 담긴 신실한 교리를 확언하고서 서로에게 “이 진리대로 삽시다! 이 진리를 적용하며 그대로 행하도록 서로 도웁시다!”라고 권면할 책임이 회중에게 있다. 디모데후서 4장 3-4절이 부정적으로 지적하듯이, 설교를 경청하는 것은 가르침의 내용을 승인할지 말지 결정하는 신학적 행위이다. 

나머지 모든 것 

이제 “교회 생활의 나머지에 대해서는 어떠한가?”라는 물음이 남아 있다. 예산, 주일학교 학급, 소그룹 전략, 선교, 교회의 다른 사역 등은 멤버십, 권징, 교리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이들은 회중의 책임 밖에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교회 생활의 일부인 이 모든 필수 요소들도 궁극적으로 교회의 교리적 협약(doctrinal commitments)의 표현이다. 그 관계가 더 직접적이거나 덜 직접적일 수 있지만, 이들 모두는 실천적인 교리 적용을 요한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회중의 역할을 거부한 것이다!). 

주일학교들은 교회의 가르치는 사역의 확장이며, 따라서 교리적 가르침과 관련하여 위에 언급한 사항이 그대로 적용된다. 예산은 교회의 신학적 협약을 반영한다. 소그룹 정책은, 교회마다 다른 방식이겠지만, 신학적 우선순위와 목표를 표현한다. 선교 전략은 여러 가지 신학적 확신들을 드러낸다. 

우리가 여기서 민주주의적 무질서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장로들이 리더십과 권위를 행사해야 한다. 그러나 장로들이 주일학교 교사들을 임명하고 커리큘럼을 결정할 수 있지만, 거짓 교사들에 대해 “비상 브레이크”를 밟는 권한뿐 아니라 가르침의 과정에서 서로를 평가하고 확언하며 격려할 책임이 여전히 회중에게 있다. 모든 멤버가 예산 편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회중은 교회의 예산을 재검토하고 확언하며 헌신적으로 채워 넣거나 또는 거부권을 행사하여 예산을 교회의 교리적 협약에 더 잘 맞도록 수정할 것을 요구하는 책임을 담당해야 한다. 회중은 자동차의 엔진과 같다. 장로들이 가스를 넣고 핸들을 잡을 수 있지만, 엔진이 작동하지 않으면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회중주의는 회중의 모든 멤버가 교회의 모든 일에 관여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행하는 것(멤버들의 삶), 가르치는 것(교리), 또한 사역하는 것(멤버들을 통한 교리 사역) 등의 책임이 전체로서의 회중에게 있음을 뜻한다. 멤버십과 권징과 교리는 교회 생활 전체와 관련된다. 

정치형태로부터 실천에 이르기까지 

회중으로 하여금 교회의 삶 전체에 걸쳐 책임을 지고 역할을 수행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멤버들과 함께 갖는 질의응답 시간이나 교회 정치형태에 대해 배우는 월요일 밤 모임 같은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단순히 교회 달력에다 더 많은 행사들을 기재하는 것만으로는 핵심을 놓치게 된다. 더 많은 행사들이 매일의 책무를 감당하는 삶을 살도록 회중을 도와주진 않을 것이다. 

어떠한 투표보다 더 근본적으로, 회중주의는 자신의 주도로 새로운 회심자와 함께 성경을 읽기 시작하는 멤버에 관한 것이다. 교회에 미치는 죄의 영향을 비통해 하는 마음에서 동료 멤버의 회개를 촉구하는 멤버에 관한 것이다. 불신자 직장 동료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교우들에게 부탁하는 멤버에 관한 것이다. 어떤 종류의 정치형태에 속했든, 모든 교회 리더는 이런 일들을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행동을 어떤 그리스도인 그룹을 교회이게 하는 본질로 인식하는 것은 회중주의뿐이다. 

이런 종류의 살아 숨쉬는 회중주의는 힘을 발휘한다. 교회 생활 전반에 걸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책무를 떠맡아 실행하도록 회중을 훈련하는 데에는 지름길이 없다. 그것은-사역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해 성도를 준비시키는 것은-장로들이 할 일이다(엡 4:12). 그런 종류의 훈련과 준비는 길고 더디며 때로는 실망스러운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을 거친 후에도, 바람직한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할 일이 더 있다. 

회중주의를 단순히 교인 총회로 격하시킬 때, 당신은 주님이 좋은 정치형태를 통해 교회에 주시고자 하신 축복의 많은 부분을 스스로 놓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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