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삶

우리가 제자화를 하지 않는 다섯 가지 이유(4부)

아티클
08.26.2014

앞의 세 칼럼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명령과는 반대로 우리가 제자화를 하지 않는 네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우리가 제자화를 하지 않는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이유는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것의 저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들은 너무나 자주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복음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당연시한다. 

얼마 전, 나는 런던 인근의 한 교회에서 강연하도록 초청받았다. 그 교회는 교인들의 수가 줄고 있었으므로,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 교회는 성도를 위해 편한 시간에 드릴 수 있는 예배를 하나 더 마련했다. 그리고 전국에서 강사들을 초청했다. 또한, 마케팅에 돈을 썼고, 사례비를 지불하고서 100마일 떨어진 곳으로부터 찬양 밴드를 불렀다. 

나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출석률이 감소하는 이유에 대해 그 교회의 한 멤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민감한 질문일 수 있지만 복음을 전하는 설교가 어떻게 행해지고 있나요?”라고 내가 물었다. 그는 의미 있는 그리고 약간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 해요.” 

그의 대답은 “만일 우리가 교회를 복음으로 채울 수 없다면 텅 비게 두라.”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말을 떠올리게 했다. 왜 그럴까? 방법론이나 마케팅이나 음악으로 채워진 교회는 제자들로 가득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단기적인 숫자의 증가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크 데버가 말했듯이, “신약성경에서 강력히 권고하며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성장은 단순히 수적인 것이 아니다. 만일 현재 당신의 교회가 몇 년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면, 그것이 건강한 교회임을 뜻하는 것일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Nine Marks of a Healthy Church, 2-1-202). 

복음에 대한 정규적이고 신실한 가르침이 없는 “성장”은 깊이 없는 성장이다. 이것은 대양처럼 넓지만 웅덩이처럼 얕다. 만일 우리가 넓이뿐만 아니라 깊이도 원한다면, 복음으로 가득한 설교와 대화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사항이 하나 있다. “복음 핵심” 또는 “복음 중심”을 강조하는 교회들마저 복음을 핵심과 중심에 너무 가까이 둠으로써 실제로는 복음이 감춰지게 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언급하고 “복음”을 거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서로에게 실제로 상기시키는 데까지는 결코 나아가지 못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복음을 실제로 선포하지는 않고 그것을 당연시할 수 있다. 

나는 성경을 믿으며 복음주의를 자처하는 교회들에서 이런 모습을 거듭 보아왔다. 최근에 웨일즈에서 휴가를 보내는 중, 나는 크고 근사한 회중교회의 한 소그룹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소그룹을 인도하는 목사가 나를 따뜻하게 환영해주면서, 마치 변명하듯이 말했다. “요즘 우려스럽게도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것 같아요.” 그는 디모데전서 3장을 본문으로 삼아 부의 기만성에 대해 말했다. 신실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언급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D. A. 카슨은, 『신자들을 위한 기본사항』Basics for Belivers에서 다음과 같은 사려 깊은 언급을 했다.

 

서구의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바깥 둘레에만 초점을 맞추는 염려되는 경향이 있다. 나의 동료인 폴 피버트 박사는 메노파 출신으로, 매우 간단하지만 유용한 방식으로 메노파를 분석한다. 메노파의 한 세대는 복음을 믿는 동시에 복음에 특정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입장도 취했다. 다음 세대는 복음을 당연시하되 복음을 그 함축된 의미와 동일시했다. 그 다음 세대는 복음을 부인하고 그 ‘함축된 의미’를 전부로 여겼다. 이 사실에 비추어 생각하건대, 복음주의 진영의 많은 교회들이 위의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하고 일부는 세 번째 단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가 사회적 영향이 제거된 복음을 미묘하게 권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국의 ‘복음주의적 각성 운동’과 미국의 ‘대각성 운동’ 그리고 하웰 해리스, 조지 휫트필드, 웨슬리 형제 등의 특출한 사역들에 대한 글을 지혜롭게 재차 읽는다. 하나님께로 돌이킨 회심자들이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형법 법규를 개혁하고, 노동조합을 시작하고, 교도소를 개조하며, 또한 어린이들을 광산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어떻게 투쟁했는지를 우리는 상기한다. 회심한 남녀들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모든 사회적인 변혁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예외 없이 복음을 우선시했다. 그들은 복음에 심취했고, 복음을 전했으며,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복음 중심적인 성경 읽기와 강해를 소중히 여겼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더 넓은 사회적 과제로 나아갔다. 요컨대, 그들은 복음을 가장 우선적으로 열망했다. 가장 후순위에 둔 것이 아니다. 이 우선순위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복음을 거부하는 세대로부터 멀지 않은 셈이다(26-28). 

만일 카슨의 고찰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현재 세대에게만이 아니라 장래의 세대들에 대한 책임도 지고 있다. 

19세기 설교가 찰스 스펄전도 유사한 언급을 했다. 

나느 그리스도로 가득한 설교가 듣는 자들을 회심시키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믿는다. 여러분의 설교를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며,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으로 가득 채우라. 형제들이여, 나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설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다른 것은 전혀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종종 내게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 나의 대답은 항상 동일하다. 복음을(복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설교해 왔다는 사실 외에 내게 다른 비결은 없다…(The Soul Winner, 35). 

형제자매들이여, 설교단에서든 일상적인 대화에서든, 다른 사람들을 제자화할 때 복음을 당연시하고 있는가? 복음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설명하지 않고 복음을 언급하기만 하는가? 적어도 우리가 하는 말 그 자체만으로 판단해볼 때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는가? 

우리가 복음을 당연시하지 않고 실제로 선포할 때, 비로소 우리가 바라는 깊고 폭넓은 제자화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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