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삶

교회의 건강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라

아티클
02.26.2010

이것은 교리에 밝고 교리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나름대로의 교회론적 입장을 지닌 자들 말이다. 교회의 실천사항과 구조에 대해 성경이 알려준다고 생각하는 목사들과 장로들이 주로 이에 해당할 것이다. 

가만 있자. 지금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9Marks에서 일하는 우리 모두와 어쩌면 당신에게도 해당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9Marks에서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지만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이 있다. 우리가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보다는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더 사랑할 수 있다. 마치 우리는 미혼남일 때는 아내에 대한 관념을 사랑하지만, 실제 여성과 결혼한 후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그녀에 대한 관념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과 유사하다. 또한 어떤 엄마가 딸 자체를 사랑하기보다 완벽한 딸에 대한 자신의 꿈을 더 사랑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이는 “건강한 교회”에 대해 책과 컨퍼런스와 사역들을 통해 배운 우리 모두에게 내재된 위험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소속되게 하신 교회 그 자체보다 건강한 교회에 대한 관념을 더 사랑하기 시작한다. 

나는 어느 장로가 한 가족에 대해 불평하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성찬(또는 주의 만찬)에서 성찬용 빵을 담은 접시가 돌려질 때 그 가족이 그 가족 중의 세례(또는 침례) 받지 않은 자녀들이 성찬을 받게 했다는 불평이었다. 그 장로의 어조가 내 귀에 거슬렸다. 그는 실망과 약간의 경멸까지 담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바보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가족은 아직 가르침을 받지 못한 양들이었다. 그들이 잘 모른 건 사실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 장로를 주신 것은, 그들에 대해 불평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으로 가르쳐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그 장로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기보다 성경적인 교회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더 사랑하는 것 같았다. 

이 장로처럼 반응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내가 말하고 있지 않은 것 

나는 그저 사람들만 사랑하면 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교회에 대해서는 일절 잊어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마치 이들 둘이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건 마치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립시키려는 것과 같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유익을 바라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규정하실 수 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유익하다고 규정하시는 모든 방향으로 교회가 성장하길 원함을 뜻한다. 그것은 당신의 교회가 성경적인 방향으로 자라길 원하는 것이다. 

더 간단히 말해서, 만일 당신이 자녀를 사랑한다면 그들이 건강하길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의 건강보다 교회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죽으셨을 때, 그분은 교회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다. 또한 그분은 교회를 자신과 동일시하시고, 자신의 이름을 교회에다 두셨다. 따라서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이며(행 9:5), 한 그리스도인 개인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전 8:12; 비교 6:15).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보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 위에, 교인 총회에서 자기 말만 너무 많이 하는 그리스도인들 위에, 그리고 세례(또는 침례)를 받지 않은 자녀를 성찬(또는 주의 만찬)에 참여시키는 그리스도인들 위에 자신의 이름을 두셨음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미숙하고 불완전한 신학을 지닌 그리스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성경적인 리더십 구조와 교회 권징 행사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그들이 나를 대표한다. 그들에게 죄를 범하면 곧 내게 죄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가! 그것은 허다한 죄를 덮고 죄인을 감싸 안는다. 실제로, 그것은 단지 죄인을 감싸 안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정체성과 영광 전체를 죄인에게 부여하신다. 그의 이름이 그들 위에 있고, 그의 영광이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항상 복음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목사는 자신의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어야 한다 

한 신학자가 자신의 것을 주는 것과 자신을 주는 것을 구별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복음적 사랑의 중요한 한 측면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가진 무언가를 당신에게 줄 때 나는 나의 지혜, 기쁨, 물건, 힘 등 내가 지닌 어떤 것을 당신에게 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는 실제로 무엇인가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주는 대신 찬사를 얻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내가 지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심지어 내 몸을 불 속에 내던지고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주는 것은 그와 다르다. 그것은 단지 내가 가진 무언가를 주는 것이 아니며, 내 자아 전체를 주는 것이다. 내 자아를 당신의 자아와 동일시한다. 나는 당신의 이름과 명성에 유의하기 시작한다. 그것들이 나 자신의 이름과 명성에 연합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내가 지닐 수 있는 모든 영광이 당신의 것이 되고, 당신이 지닌 모든 영광이 내가 가장 기뻐하는 영광이다. 그것은 내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 나누는 사랑이 바로 이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서로를 포용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의 무게를 서로에게 얹는다. 서로의 영광과 슬픔을 나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6).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서로를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긴다(빌 2:1-11). 우리는 이제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며, 따라서 이제 형제자매이다(마 12:50; 엡 2:19 등). 만일 당신이 내 형제를 모욕하면 나를 모욕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내 자매를 사취하면 나를 사취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행하는 일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모든 것은 인격적이다. 왜냐하면 복음이 인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인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을 대표하며 그분을 닮을 수 있다. (그렇다. 서로를 위한 사랑의 최종적 초점은 그분께 맞춰져 있다. 이것은 마치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과 마찬가지다-그분의 사랑은 아버지를 위한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처럼 사랑해야 한다면 목사와 장로들은 가장 확실히 그리해야 한다. 

교회의 건강보다 교회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건강한 교회의 법도를 지키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에 속했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교회의 법도가 근사하며 성경적일지라도 그러하다). 이는 그들이 행한 일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선언하신 것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야 함을 뜻한다. 

당신이 자녀를 사랑하면, 당신은 그들이 건강하길 원한다. 또한 당신이 자녀를 사랑하면, 그들이 건강하든 않든 그들을 사랑한다. 

형제나 자매가 신학적 이해 면에서 성장하면 분명 당신은 기뻐할 수 있다. 이제 진리의 결속이 더 강해진 것을 기뻐한다(요한이서 1절을 보라). 하지만 당신의 복음적인 사랑, 즉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사랑을 본받는 사랑은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심지어 도덕적으로 미성숙한 형제들에게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형제의 완벽함과 진실함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진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목사여, 만일 당신의 교회가 연약한 신자들로 가득하다 하더라도, 당신은 마치 그들이 강건한 것처럼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신학에 공감하는 성숙한 형제에 대해서는 “같은 마음”을(이는 개혁파 측에서 흔히 쓰는 문구이다) 지녔음을 더 느낄 수 있다. 좋다. 그러나 만일 신학적으로 마음이 통하는 그 형제가 덜 신학적이며 덜 성숙한 형제를 함께 멸시할 것을 제의하면, 그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라.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1-32). 

장로여, 양떼를 아들과 딸처럼 사랑하라. 그들의 삶의 관람석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자유투를 던지는 날에 그리고 코트를 달리는 날에 그들을 응원하라. 그들의 웃음과 두려움을 당신의 것으로 여기라. 그들의 어리석은 실책을 함께 아파하라. 그들이 당신을 비방할 때 위협을 느끼지 말라. 저주를 축복으로 돌려주라. 마음에서 죄를 물리치는 일은 더디게 진행됨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들이 항상 스스로 잘해낼 수는 없음을 기억하라. 당신을 오래도록 참아 오신 분처럼 당신도 인내하라. 

혹은 다른 성경적인 비유를 사용하자면, 교회를 위한 당신의 사랑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는 사랑은 아닐지라도 “좋을 때나 궂을 때나, 부자일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어야 한다.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몸에 헌신하듯이 교회에 헌신해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같이 사랑했다 

바울이 교회를 이같이 사랑했다. 그가 준 것은 자신의 그 무엇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그는 빌립보인들에게 이르기를, 그들이 그의 “기쁨과 면류관”이라고 했다(빌 4:1). 데살로니가인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살전 2:19-20). 

목사인 당신은 완고하며 신학적으로 무지한 교인들을 당신의 기쁨과 면류관으로 여기는가? 당신 자신을 철저히 그들과 동일시하는가? 바울은 교회들이 자신의 “자랑”이라고 말한다(고후 1:14; 참조, 살후 1:4). 당신도 그러한가?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이르기를, 그들이 그의 “자녀”이며 그가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고 말했다(고전 4:14-15). 그는 갈라디아인들과 디모데와 디도에게서도 그렇게 느꼈다(갈 4:19; 딤전 1:2; 딛 1:4). 

장로여, 당신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듯이 당신의 이름과 명성을 당신의 교회와 결부시키는가? 

바울은 사랑과 열망을 담은 말을 얼마나 자주 하는가! 그는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고, 교회들도 동일하게 행하기를 갈망한다(고후 6:12-13). 그는 그들을 보며 그들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롬 1:11; 빌 4:1; 살전 3:6; 딤후 1:4).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들을 사모한다(빌 1:8). 또한 그는 자신의 곤경이 교회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고 자신의 위로가 그들의 위로를 위함임을 알고 있다(고후 1:6). 바울은 자신의 그 무엇을 교회에게 주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자신을 위해 일부를 감추지 않았다. 자신을 주었다. 

바울은 단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만을 이같이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의 서신들을 읽어보라. 그러면 당신은 바울 서신의 수신 교회들 중 다수가 얼마나 불건전했는지를 금방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사랑을 북돋우셔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았듯이 우리도 바울을 본받을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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