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삶

가난한 지역사회 안에서 교리가 중요한가?

아티클
02.01.2016

몇 년 전에 나는(마이크) 오래된 대학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그는 자신의 목회관이 학생 시절 이후로 바뀌어 왔음을 설명했다. 현재 그는 여러 지방 대학 캠퍼스들에서 대학 사역의 리더십을 맡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는 15년 전에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십자가 중심”(그의 표현임)이지 않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봐, 마이크, 우린…너무 교리적인 것을 선호하지 않아. 분명 십자가는 중요해. 하지만 우리는 속죄에 대한 16세기의 논점에 몰두하고 싶진 않아. 예수님은 당신의 구원을 묘사하기 위해, 겨자씨 비유 같은 다양한 이미지들을 많이 사용하셨어.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그리고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길 원해. 해야 할 좋은 일들이 많이 있으므로 그저 신학에 몰두할 수는 없어.” 

사도 바울이 내 친구의 우선순위에 동의할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잠시 미뤄두더라도(바울은 겨자씨처럼 뻗어나가는 하나님 나라 외에는 아무 것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선언했다[고전 2:2]), 친구가 말하고자 한 핵심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예를 들어, 당신이 먼 도시의 사람들에게 임박한 파멸을 경고하기 위해 배를 타고 항해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만일 당신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그곳 사람들은 모조리 죽는다. 당연히 당신은 가능한 한 빨리 배가 나아가기를 원할 것이다.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여분의 짐들을 모조리 제거할 것이다. 이때 깨끗한 갑판이나 윤기 나는 놋 제품들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임무가 긴급하므로 효율성과 간편함이 요구된다. 

내 친구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의 긴박성이 신학적인 돛을 없애고 교리적 엄밀함이라는 무거운 화물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것들은 협력해야 할 사람들 간에 언쟁과 다툼을 일으킬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가난한 자들이 압제당하며 포로들이 결박되어 있는 상황에서, 책을 쓰거나 콘퍼런스를 개최하거나 몇몇 단어들의 의미를 놓고서 논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타락후선택설에 대한 인터넷상의 논쟁에 들이는 시간을 줄이고 이웃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과 결핍된 자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교회가 신학에 대한 대화와 확신을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다. 

교리는 배에 싣는 화물이 아니라 선체와 돛대이다. 

한 교회의 증언의 특성과 질을 결정하는 것은 그 교회의 교리이다. 교회의 신학이 그 교회의 목표를 형성하고 또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형성한다. 

여기서 생기는 물음은 이것이다. 제자 삼는 것은 교회가 교리를 알고 가르칠 것을 요구하는가? 우리가 단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고 섬김의 행동을 통해 지역사회를 갱신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이들 한 쌍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신약성경은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신학이 필수적임을 알려준다. 그러면 구원과 성화, 이 두 가지에 대해 살펴보자. 

구원은 교리를 요구한다 

교리의 필수성을 비판하는 이들이 때로 비아냥거리며 말하기를,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올바른 교리적 공식이 들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 머리를 열어보시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한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실 것이다. “너는 나를 믿었느냐? 네가 만들어 낸 내가 아니라 참된 나를 믿었느냐?” 달리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확실한 진리들을 믿는지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으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있어 교리적인 진리는 인격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진리들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로 돌이키며 그분을 신뢰하지 않으면, 그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롬 10:13-17). 구원을 위해서는 교리가 요구된다! 

사도들이 제자로 삼을 때 교리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도들과 다른 사역자들이 믿지 않는 무리들에게 전했던 교리적인 주제들이 사도행전에 두루 나온다.

  • 성령(2:14-21)
  •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2:23; 17:26)
  • 그리스도의 부활(2:24-32; 3:15)
  •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8:32-35; 13:28-29)
  • 예수님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언(3:22-24; 7:2-53; 28:23)
  • 다가오는 심판의 실재(10:42; 17:31; 24:25)
  • 그리스도의 배타성(4:12; 19:26)
  • 창조주 하나님(14:15-17; 17:24)
  • 하나님의 자기충족성(17:24-25)
  • 하나님의 나라(19:8; 28:23)

사도들은 불신자들이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특정한 진리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낙심하고 의기소침해진 바울에게 예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신다(행 23:11). 예수님은 바울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향한) 복음전도 사역 전체를 당신에 대한 사실들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요약하신다. 바울이 행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사실들을 도처로 다니면서 전했다. 

성경은 교회의 복음전도 사역에 대해 이처럼 말한다. 이를 살펴보면, 우리의 증언이 주로 궁핍한 자들을 향한 사랑과 자비의 행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말씀의 지지를 받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이 수프를 대접하거나 낙서투성이 공공건물의 벽에다 페인트칠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1천 년 동안 본다 해도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위해 죽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결론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입을 열어 복음의 내용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성화는 교리를 요구한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교리들이 필요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교리들 중 대부분이 불필요하다고 믿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대신에 공동체 내에서 예수님 닮은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은 그런 관점을 피력하지 않는다. 거듭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의 올바른 행위와 태도를 올바른 교리와 연결시킨다.

다음의 예들을 보라. 

  • 십계명. 이것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원조격인 위대한 목록이다. 그러나 경건한 삶에 대한 이 계명들 바로 앞에 무엇이 나오는가? 신학적인 내용이 나온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놀라운 능력을 시사하는 명령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적극적인 사랑의 근거를 신학에다 두신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4-45). 우리가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 아버지께서 원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 거룩하라.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도 베드로는 우리를 교리로 이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4-15). 우리가 한때 우리를 지배했던 사욕을 따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이다.
  • 바울 서신들. 끝으로, 바울 서신들은 명령의 근거를 진리에다 두는 구조를 보인다. 바울은 그의 편지를 받는 자들이 자신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기를(롬 12:1), 새 사람을 입기를(엡 4:24),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기를(골 2:6) 원한다. 하지만 그런 명령들은 반드시 교리에 대한 긴 논의 이후에 나온다. 바울은 교회들에게 칭의와 영화, 예표론과 대표론(롬 5:12-17; 8:30), 선택과 예정(엡 1:4-6), 인간의 타락(엡 2:1-3), 기독론(골 1:15-20) 등과 같은 교리들을 가르친다 

가난한 자들에게 헌신적으로 다가가는 일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를 그 닻과 동기로 삼아야 한다. 그 닻을 제거하면, 잠시 동안은 같은 지점에 머물 수 있으나 곧 배가 풍랑에 밀려갈 것이다. 그리고 헌신적인 행위도 곧 중단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순종할 것이다. 교회나 선교회에서 영접기도를 했지만 믿음에 관한 실제적이며 교리적인 내용을 배우지 못한 까닭에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성품과 그 성품이 그들의 삶에서 갖는 의미를 깊이 숙고해보지 않음으로 인해 이기심과 나태함과 죄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내하며…

가난한 공동체는 대개 교육수준이 낮기 때문에 교리를 배울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말을 나는 이따금 듣는다. 그런 주장에 따르면, 독서와 공부가 일상적이지 않은 환경에서는, 혹은 문맹이 두루 퍼진 상황에서는, 우리가 복잡한 신학 개념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억지로 시도하면 사람들이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 그런 주장은 다분히 고압적이며 남을 낮추어 보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어리석지는 않다. 그들은 누구 못지않게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방식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그의 편지들을 신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의 독자들은 대개 부유하거나 특권층이거나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신학 학위를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자신에 관한 온갖 종류의 깊고 복잡한 내용들을 그들에게 서슴없이 알려주셨다. 

가난한 사람들도 깊은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내가 미국에서 섬겼던 교회에서도 이것이 사실임을 보았고, 에딘버러에 있는 메즈(Mez)의 사역지에서도 마찬가지임을 보았다. 

고든(Gordon)을 생각해보라. 그는 40대 초반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회심 전에는 단 한 권의 책도 읽은 적이 없었다. 예전에 교회나 기독교를 접한 경험도 없었다. 그는 읽고 쓸 수 있지만 신문을 읽는 정도였다. 고든이 처음 메즈의 교회에 왔을 때, 그는 가르침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내가 구원받기 전에는 성경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마치 성경이 내 이름을 부르고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고 생각해요. 나는 예전에는 결코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인생의 깊은 물음들에 대해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해요. 줄곧 읽고 싶어요. 중요한 신학 용어들을 아직 잘 모르지만, 그것들을 배우기로 결심했답니다. 나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길 원했어요. 그를 더 많이 알기를 원했어요. 선심 쓰는 체하지 않고서 내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학교에서는 너무 힘든 일이 닥치면 포기하곤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골머리가 아플 정도로 배우기 힘든 내용도 있지만 스스로 인내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고든은 풀타임 직업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심한 마약중독자였고 혼돈의 삶을 살았다. 2분 이상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고 한다. 이제 그는 가만히 앉아서 40분 설교를 경청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박식하지 않다고 해서 그를 무시해선 안 된다. 물론, 완전한 문맹이거나 정신 지체가 있는 사람들을 섬길 경우에는 교수법을 조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훌륭한 교사들은 자신의 자료를 듣는 사람들의 수준에다 맞춘다. 우리가 너무 복잡해서 이해하기 힘든 교리 주제를 다뤄야 하는 경우도 있다. 만일 당신이 성령께 의지하여 교리를 명쾌하게 잘 가르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것을 배우며 그로 인해 성장하길 원할 것이다. 

결론 

형편이 좋지 않은 곳에서는 교리를 가르치며 믿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 복음의 확산에 방해가 될까? 그렇지 않다. 사실,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주 예수께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우리의 임무는 그러한 헌신 없이는 완수될 수 없다. 지역사회의 궁핍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복음의 실제적인 진리들을 전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단지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며 그들을 죄와 죄책 속에 방치하는 셈이다. 

편집자 주: 이 아티클은 Mike and Mez의 신간 도서 Church in Hard Places ©2016에서 편집한 것이다.  Used by permission of Crossway, a publishing ministry of Good News Publishers, Wheaton, IL 60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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